[임진왜란52] 남원성전투
‘임진왜란은 일본과 호남과의 대결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바다에서 일본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조선을 점령한 후에 호남을 지배할 예정이었던 일본의 고바야카와가 금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웅치(1592.7.7)와 이치(1592.7.8)에서 황진 장군(1550~1593)이 물리치면서 호남이 지켜졌다. 그리고 호남의 병사들이 권율과 함께 북상하여 독산성 전투(1592.12)에서 승리하고 행주대첩(1593.2)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호남은 조선이 전쟁을 하는 기반이 되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배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호남이 지켜진 것은 호남 사람들이 열심히 싸운 것도 있지만,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충청도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이 노력한 것도 알아야 한다. 고바야카와가 금산을 점령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려고 할 때 충청도의 의병장인 조헌(700명)과 승병장 영규(800)가 목숨을 바쳐 후방을 교란했다. 그리고 진주성이 호남의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이 목숨을 바쳐 지켜냈다. 경상우도의 의병들이 곽재우, 정인홍, 김면과 함께 호남으로 들어가려는 일본군을 괴롭혔다.
김면은 전 재산을 의병을 위해 탕진하고 처자식이 문전걸식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김면 자신이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만다. 김면이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只知有國 不知有身”(다만 나라 있는 줄 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은 몰랐다)
명과 일본의 휴전회담이 결렬되고, 조선과 일본이 휴전회담도 무산되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결심했지만 조선 수군이 두려워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때 일본의 구세주(?) 원균이 조선의 함대를 칠천량으로 데리고 가서 고스란히 날리면서(1597.7.15) 일본이 정유재란을 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한다.
일본군은 당시에 14만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서 호남으로 진격한다.
좌군 : 우키타 히데이에(1573~1655),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 5만 6천명
우군 : 모리 히데모토(1579~1650),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 7만 8천
수군 : 일본 수군은 섬진강을 타고 들어간다.
일본의 우군은 덕유산의 육십령을 넘어가서 황석산성을 뚫고 전주로 향했다. 그리고 좌군은 진주를 거쳐 구례로 진격했는데 당시 구례현감 이원춘(?~1597)과 화엄사 스님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족으로 전멸당하고, 이원춘은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남원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은 조선왕조 실록에 나타나 있다.
경략 형개(1540~1612)가 만력제에게 쓴 보고문 『선조실록』 1597년
“조선의 서남 일면이 전라도인데 본도의 소속은 아직까지 전파되지는 않았다. 이 도는 또 병력이 정예로워서 곧 조선의 지주임은 물론 왕경 일대의 공응도 이곳에서 조달받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왜노가 감히 경상도에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전라도에서의 후미 공격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중략)
전라도를 보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원을 보호하여야 되는데 이는 마치 대문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 대병이 이곳에 주둔하여 전라도와 더불어 함께 제압하지 않을 수 없다.”
명나라는 양원(?~1598)이라는 장수가 요동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남원으로 향했다. 양원은 심히 건방진 장수였으며 조선을 얕잡아 보는 양아치같은 장수였다. 조선의 장수들이 남원성의 북쪽에 교룡산성에서 수성전을 전개하자고 했지만 양원은 평지인 남원성에서 수성을 전개하겠다고 한다. (교룡산성은 가파르고 우물도 풍부해서 수성전이 용이했지만 양원의 객기가 나중에 엄청난 참사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명나라 장수 진우충(?~?)이 2천의 병력으로 전주에 있었고, 근처에 이원익과 권율이 조선군 1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서 그들이 지원해 준다면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597년 8월 12일, 일본의 좌군 5만 6천명이 남원성에 도착하였다. 생각보다 많은 대군에 놀란 양원이 급히 진우충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진우충이 모른척 한다. 그리고 이원익과 권율의 1만 병력은 마침 섬진강으로 북상하는 일본의 수군 때문에 잘못하면 일본군 사이에 끼일 우려가 있어서 후퇴하였다.
3천의 병력으로 5만이 넘는 일본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전라도 병마사 이복남(1555~1597)이 꽹과리를 치고 북을 치면서 남원성으로 입성한다. 일본군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복남은 이전에 웅치전투에서 황진과 함께 싸웠던 사람으로 이번에 전라도 병마사로 1천명을 이끌고 남원성에 합류한 것이다. 총 4천의 조명연합군은 명나라가 서문과 동문, 남문을 지키고 조선군이 북문을 지키기로 했다.
8월 13일, 일본군이 성벽 아래에서 다섯명이 남원성을 향해 조롱하며 약올렸다. 양원이 활로 죽이자고 했는데 이복남이 조총으로 세 명을 쏘아서 죽인다. (이제 조선군도 조총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이날에 일본군의 조총을 앞세운 공격을 비격진천뢰와 대완구로 저항해서 막아내었다.
8월 14일, 일본군이 장대를 높이 세워 위에서 조총으로 공격하여서 남문과 서문, 동문을 지키던 명나라 군사들이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 14일 저녁에 일본군 몇 명과 양원이 만났다고 한다. 이때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모른다. 결사항전의 의지를 전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양원이 성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도 있다.
8월 15일, 일본군이 해자를 메울 때 명나라는 말에 안장을 씌우고 짐을 챙기는 것이 뭔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날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서 동, 서, 남문이 뚫리고 백성들과 병사들은 북문을 지키던 이복남에게로 후퇴했다. 이복남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일본군을 껴안고 화약고에 들어가 화약을 터뜨려서 자폭하였다. 이때 양원과 수십명의 명나라 군사들이 탈출해 도망쳤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양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양원의 목을 베어서 조선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일본군은 성안의 백성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으며, 전공을 위해서 코를 베어서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나중에 남원성의 백성들 시신에는 코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남원성의 만여명의 시신을 모은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이때 전주에 있던 진우충은 그대로 도망가고, 남원이 뚫리면서 일본군은 전주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남원성전투(1597.8.12~15)
남원성 전투를 종군했던 일본 승려 쿄넨이 쓴 <조선일기>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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