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33] 역전되는 전세, 요동 기병의 고니시 공격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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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33] 역전되는 전세, 요동 기병의 고니시 공격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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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 정도까지 복습모드]

 

15924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다(53일에 한양을 빼앗김). 원래 일본군은 한양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가 도망가면서 전쟁이 꼬이게 되었다. 한양까지만 대비하고 건너온 일본군은 한양 이북의 지도나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40일이 걸렸다(615).

 

 

명나라 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약간의 식민사관에 묻혀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 부대 감소와 사기 저하
  2. 보급로 끊김
  3. 의병에 대한 두려움
  4. 명군 참전에 대한 두려움
  5. 추위에 대한 공포

 

한편 요동으로 넘어가지 못한 선조는 계속해서 요동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명나라가 거부하였다. (건너오더라도 수행원을 100명 정도로 줄이라고 요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가려고 했던 선조는 이후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소식을 듣고는 안전이 확보된 전라도로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선조의 역대급 찌질함의 끝은 어디인가?]

 

이때 요동부총관 조승훈(?~?)3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넘어온다. (징비록에는 5천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당시 조선의 병력은 2~3천명이었다고 한다.

 

우선 조승훈이 조선으로 넘어왔을 때의 상황이다.

 

선조 : “내가 나라를 잘 지키지 못하여 오늘의 환란을 오게 하여 귀국 대사들이 행차하는 수고로움을 끼쳤으니 황공하기 그지 없소이다.”
사유와 곽응징(조승훈의 부하들) : “평양을 일찍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조 총병(조승훈)이 의주에 도착하면 우리들이 돌아가서 조 대인과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귀국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습니까?”
선조 : “나라의 존망이 대인들의 진퇴에 달렸으니, 지휘를 삼가 받겠소이다.”

 

이상의 선조실록내용을 보면 조선군의 작전 지휘권을 명나라에게 넘겨줘 버린다.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에 이승만이 작전권을 넘긴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승훈이 평양성을 공격하기 전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승훈은 일본군이 도망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정도로 자신만만해 있었다.)

 

719일에 조 총병의 군사가 평양성을 치다가 이롭지 못하여 물러가고, 사유격이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이 의주에 이르자 사유는 그 부대의 선봉이 되었다. 조승훈은 요동의 용맹스러운 장수로서 여러 번 북쪽 오랑캐와 싸워서 공을 세웠으므로, 이번 행군에서도 왜적을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면서 가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평양성에 있는 왜적이 벌써 달아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므로, “아직 물러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조승훈은 술잔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도하기를 적군이 아직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하늘이 나로 하여금 큰 공을 이루도록 하심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그는 순안으로부터 삼경에 군사를 출발시켜 나아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마침 큰 비가 와서 성 위에는 지키는 군사가 없었다.

 

당시 평양에는 고니시 부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3선발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의 부대도 있었다. 그런데 조승훈에게 조선의 관료들은 평양성에 2천여 명의 왜군이 있다고 말했다. 요동 기병을 믿고 있던 조승훈은 자신만만하게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간신히 살아서 도망치게 되었다. 일단 패배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핑계거리를 찾았는데 우선 평양성에 2천으로 보고 받았는데 막상 공격했을 때는 1만의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보고를 받았던 것과, 평양성에서 일본군이 사용하지 않는 편전이 날아왔다는 것을 가지고 조선과 일본이 내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지게 되었다. (조승훈은 다시 요동으로 가버린다)

 

그대 나라가 처음에 왜놈들은 단지 철환과 장검만 쓰고 다른 기술은 없으며, 그 수효도 1~2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중국 군사 중에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왜적의 수효도 1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속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 (중략) ...
신은 대답하였습니다. ‘아군의 전사자가 전후로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화살에 맞아 죽은 자는 없었습니다. 지금 중국 군사가 화살에 맞은 것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평양의 왜적이 쏘았다는 것은 아마 사로잡힌 우리나라 사람이 쏜 것을 말할 겁니다. 적의 수효에 대하여는 절도사가 보고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
『선조실록』

 

선조 : “평양성에서 화살을 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윤근수 : “큰 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적병들이 처음에는 목궁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이 힘이 세지 않았다. 그런데 흰 깃발을 휘두르며 오는 자가 있자 편전, 장전으로 어지럽게 쏘아댔다. 이는 반드시 너희 나라 사람이 적병에게 투항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이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1537~1599)이 심유경(1527_1597)이라는 협상가를 보냈고, 심유경이 고니시를 만나서 일단 50일간의 휴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요동의 책임자였던 이여송(1549~1598)43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넘어온다. 이여송이 거느리고 온 병력은 요동의 기병과 척계광(1528~1588)이 양성한 절강성 부대(성벽을 잘 기어오르는 병력)였다.

 

당시 명나라의 최고 장수는 척계광과 이여송의 부친인 이성량(1526~1618)이었는데 이여송은 이성량의 아들이었다. (이성량의 할아버지는 원래 조선사람이었는데 살인사건으로 요동으로 튄 인물이다.)

 

[징비록 중 이여송이 유성룡에게 보낸 시]
군사 거느리고 압록강 건너온 것은
삼한의 나라가 불안해서요
황제께선 날마다 승첩 소식 기다리므로
미천한 신하 밤에도 술 마시지 못한다오
살기 품고 왔건만 마음 오히려 장해지니
이제부턴 요망한 적들 뼈가 시릴 것이오
담소 중에도 승산 아닌 것 감히 말 않고
꿈속에도 말 달리는 싸움터만 나온다오

 

이여송이 언급한 황제는 명나라 만력제(재위 1572~1620)이다. 이제 이여송이 거느리고 온 5만의 병력과 조선의 1만 병력, 그리고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합류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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