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가 함경도를 장악하고 여진족까지 공격했다가 패하고 길주까지 내려왔다가 가장 따뜻한 안변까지 내려가 있었다.
일본군과 왜군? 당시 사료에는 ‘왜군’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왜’(倭)는 일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고, 왜구(倭寇)는 일본의 해적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본(日本)은 7세기 중반 이후 사용된 왜(倭)의 국호(國號)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적을 ‘왜군’이나 ‘일본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함경도는 왜 반역의 땅이 되었을까? 원래 이성계는 함경도에 있는 군사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단종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1453)이 발생하였고, 이때 김종서의 부하였던 6진의 책임자 이징옥(1399~1453)이 난을 일으켰다(1453). 그리고 수양대군이 왕으로 즉위한 후에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났다. 이후 세조의 자손들이 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함경도는 ‘반역의 땅’으로 인식이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오늘날의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순왜인이라고 한다. ‘순왜(順倭)’란 왜란 당시에 조선인으로 일본에 협력한 자를 말하며,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서 가토에게 바친 국경인 같은 사람을 말한다. (국경인의 작은 아버지가 국세필이다) 가토는 함경도 지역의 순왜인들에게 지역의 치안을 맡기고 일본의 관직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가토의 병력이 규슈 지방에서 건너온 병력이기 때문에 추위에 약했고, 괜히 여진족을 공격해서 벌집을 건드려 놓은 것이기에 조선인으로서 여진족의 총알받이를 하도록 한 것이다. 가토는 함경도에서 가장 따뜻한 안변으로 내려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에 7월경에 웅치ㆍ이치에서 황진이 승리했고, 권응수 장군이 경상도의 영천성을 탈환하면서 분위기를 살짝 바꿔놓았고, 9월이 되면서 조선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9.1)으로 일본의 본진을 털어버렸고, 이정암 장군이 황해도 연안성 전투(9.1)에서 승리하면서 연백평야를 지켜냈으며, 박진 장군이 경주성 탈환(9.8)하였다.
이러한 승전의 소식들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함경도 주민들도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가토가 함경도를 지배하면서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들였고, 이러한 착취에 순왜인들이 앞장서게 되면서 불만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조만간 명나라가 참전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아무리 힘들어도 조선의 백성으로 착취당하는 게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정문부(1565~1624)가 함경도에서 등장한 것이다. 만약 선무 1등공신을 세 명 정하라고 한다면 1번에 이순신(1545~1598), 2번은 주저할 것 없이 정문부(1565~1624)를 선택할 것이고 3번에 권율과 김시민과 황진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문부는 함경도 전체를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정문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 함경북도 병마사 한극함(?~1593)의 참모격인 북평사(정6품)라는 관직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해정창전투(1592.7.17)에서 한극함이 피했을 때 함께 패하고 잠적했을 것이다.
정문부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무반의 관리지만 문과 급제자였기에 당시 유생들에게 글공부를 시켰고, 나름 명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함경도 지방의 유생들이 의병을 스르로 모아서 총사령관으로 정문부를 추대한 것이다.
정문부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순왜인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정문부는 경성의 국세필을 처단하기 위해 수백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성으로 향했다. ‘순왜활동을 눈감아주고, 우선적으로 여진족의 공격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국세필은 항복을 하였고, 정문부는 경성을 회복한 후 명천을 때려서 정말수를 제거하였다. 이후 주변에서 국세필을 처단하라는 압박이 심해지고 결국 정문부는 국세필을 비롯해서 13명을 죽여 효시하면서 ‘더 이상의 순왜인 처단은 없다’며 힘이 없어서 순왜활동에 침묵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활동을 참회하는 심정으로 정문부에게 합류하게 된다.
당시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는 가토에게 항복했었는데 정문부 휘하에 들어왔다. 정문부는 정6품이었는데 부사였던 정현룡이나 오응태는 종3품으로 품계가 높고 나이도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기꺼이 정문부가 함경도 의병을 총 지휘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로써 28세의 청년의병장이 등장한 것이다.
한편 국경인 밑에 있는 신세준(?~?)이라는 유생이 나머지 유생들을 끌어 모아서 국경인을 처단하면서 정문부는 6진을 회복하게 된다. 정문부 휘하에 5천의 병력이 모여졌는데, 그는 6진에다가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병력을 배치해 놓고, 1,500의 병력으로 길주 아래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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