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1선발 고니시와 2선발 가토, 3선발 구로다가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니시의 부대는 계속 북상해서 평양까지 진격하였고, 2선발 가토는 함경도 쪽으로, 4선발 시마즈는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다. 평안북도의 북쪽 지역과 전라도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조선은 이순신이 옥포(1592.5.7), 합포(1592.5.7), 적진포(1592.5.8)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2차 출정에서 사천(1592.5.29), 당포(1592.6.2), 당항포(1592.6.5), 율포(1592.6.7)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남해와 서해바다의 제해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웅치(1592.7.7)와 이치(1592.7.8)에서 황진 장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전라도를 구해냈다.
9월 대반격 이전에 권응수 장군이 적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도의 영천성을 회복하였고, 9월이 되면서 연안성전투(1592.8.28)에서 이정암 장군이 승리하면서 황해도를 지켜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9월 1일에 부산포해전(9.1)에서 적의 본진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9월 8일에 박진 장군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9월에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의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경상좌도에서는 정인홍, 김면, 곽재우가 활약하면서 일본군은 더이상 호남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나라 구원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의 양상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 200년간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던 조선군은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일본군은 120년의 전국시대를 통해서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고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지속되면서 조선군은 나름 전투 경험을 쌓았고, 조총에 대한 저항법을 익혀나갔다. 백병전에서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머리 하나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은 수륙병진작전이 막혀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육로의 보급은 도로사정이 안좋고 도중에 의병이 괴롭히고, 명나라의 참전소식이 들려오면서 일본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조선의 겨울이 다가오면서 추위에 대한 공포감이 커지게 되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의 상당수가 따뜻한 규슈 지방에서 온 병사들이어서 추위에 약했다.
일본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호남을 접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1월이면 호남에서 수확되는 쌀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식량을 확보 차원에서도 필요했고, 육지를 통해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일본군은 남쪽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려면 진주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진주성의 성주는 이경(?~?)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하 김시민(1554~1592)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가서 숨었다. 이때 경상도 초유사가 된 김성일(1538~1593)이 이경과 김시민을 부르게 되고, 이경은 지리산에서 병으로 그냥 죽었고(도망갔다는 설도 있음), 김시민은 진주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성일은 김시민에게 임시 진주목사 자리를 주고 독력하였다고 한다.
김시민은 임시목사로 경상도 남쪽 사천, 고성, 진해 등을 공격해서 회복하여 남해안 루트를 조선 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함안군수인 유승인(1565~1592)은 창원을 공격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정식 진주목사로 발령하였고, 함안군수 유승인은 경상우병사로 임명하였다.
부산에 있던 일본의 3만 병력이 창원, 진해, 함안을 깨고 진주로 향하였다. 부산에서 진주까지 오는데 보름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만큼 도중에 조선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수 있다. 함안군수에서 경상우병사로 승진한 유승인이 패해서 진주성으로 와서 성안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하지만 김시민은 그를 성 안으로 들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시민은 정3품의 진주목사였고, 유승인은 종2품의 경상우병사였기에 지휘체계가 혼선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시민의 결정은 당시 진주성에 있던 초유사 김성일과 논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적이 진주에 육박했을 때 유승인이 말을 달려 성 아래에 이르러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김시민이 장수의 명령 계통이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문을 계엄중에 열고 닫을 때 창졸간에 변이 있게될까 염려되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해 주면 좋겠다’ 하였다. 유승인이 돌아오다 적을 만나 패하여 사천 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중략)... 곽재우가 김시민이 유승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진주성이 크기 때문에 성을 지키려면 1만의 병력이 있어야 하지만 당시 진주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3,800명이었다.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3만(2만이라는 설도 있음)이었고, 하세가와 히데카즈(?~1594), 호소카와 다다오키(1563~1646)가 지휘하고 있었다.
진주성 남쪽에 남강이 흐르고 있어서 만약 일본군이 함대를 끌고오면 위험한 상황이 생겼겠지만, 남해를 돌아오려면 이순신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한쪽 면(남쪽)은 막아놓은 것이다. 동쪽은 후방이 안정적이지만 호남쪽의 서쪽은 후방이 든든하지 못해서 산발적인 공격만 하게 되었다. (북쪽에는 곽재우가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교란시켰다)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동문쪽으로 진행되었다. (진주성은 성문 앞에 옹성이 하나 더 있어서 성문을 공략하기가 다른 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10월 6일 전투 첫날에 일본군은 조선인 어린아이들을 풀어서 항복을 권했지만, 김시민은 동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심리전에 넘어가지 않았다. 김시민은 여인들과 노인들까지 군복을 입혀서 병사가 많아보이게 하고 허수아비를 세워서 일본군이 조총 탄환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일본군은 수많은 공성무이과 사다리를 가지고 왔으며, 사다리를 기어오르다가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것에 대비해서 가면(탈)까지 쓰고 있었다고 한다. 북쪽을 공격하는 일본군의 후방에서 곽재우가 횃불을 들고 호각소리를 내면서 교란작전을 시도하였다. 서쪽에서는 호남의 의병인 최경회(1532~1593)가 일본군의 후방을 신경쓰게 만드었다.
10월 7일은 하루종일 공격하다가 저녁에는 소강상태가 되었는데, 김시민 장군이 심리전을 이용해서 동쪽 문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기도 했다.
10월 8일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서 성이 거의 점령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0월 9일이 되어 일본군이 철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때 일본군 진영을 탈출한 조선인 꼬마가 거짓 퇴각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10월 10일 새벽에 일본군이 총공격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고 한다. 오전 11시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국 일본군은 시신을 불태우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시체더미에 숨어있던 일본군 저격수가 김시민을 저격해서 김시민은 쓰러졌고,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김시민의 역할을 하면서 북을 치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조선군은 승리했지만 김시민은 혼수상태로 며칠을 보내다가 결국 죽고 만다. 김시민의 고향인 천안까지 상여가 이동했는데 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전송했다고 한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3,800명 중에 800명의 전사자가 생겼고, 일본군은 3만의 병력 중에서 1만의 전사자가 생겼는데, 장교만 3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승리에 대해서 김시민은 선무2등공신에 오르게 된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서 처음에는 동문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둘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
『선조수정실록』 26권
[김시민 장군의 전투 직전 훈시]
“나는 마땅히 충의(忠義)를 맹세하고 진주를 지켜 국가중흥(國家中興)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를 따르는 자, 살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멸할 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금 뜸해졌다. 성 안의 나무와 돌, 기와, 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군수 이광악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비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뚫고 흩어졌다.”
『선조수정실록』 26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해서 너무나 화가 났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 6월 22일에 10만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한다(2차 진주성 전투). 그리고 진주성을 함락하고 6만의 조선의 백성을 도륙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일본은 김시민의 이름은 모르지만 진주목사에 대한 강렬한 경험과 공포감이 생겼다. 그래서 ‘목사’를 ‘모쿠소’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일본의 이야기 중에는 모쿠소가 괴물로 등장하기도 하고, 모쿠소의 아들 덴지쿠 도쿠메가 두꺼비를 타고와서 일본을 멸망시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김시민은 이순신과 함께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진주성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매년 10월경 ‘진주 남강 유등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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