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출정 때 옥포ㆍ합포ㆍ적진포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2차 출정에서 노량에서 원균의 부대와(판옥선 3척) 합류해서 만나 5월 29일 사천에서 왜선 13척을 작살내고, 사량도에서 머문 후에 6월 2일 당포의 왜군 21척을 부수고 구루지마 미치유기1557~1592)를 죽이고 가메이 고레노리(1557~1612)의 부채를 획득한다. 그리고 당포 근처에서 6월 4일에 전라우수영 이억기의 함대와 만나게 된다.
전라우수영(25척), 전라좌수영(23척), 경상우수영(3척)의 연합함대를 누가 지휘할 것인가? 당시 이순신보다 16살이 어린 이억기는 이순신을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한다.
6월 2일, 당포해전 당시 후방에 나타났던 왜군이 거제도도 도망갔는데 정보에 의하면 그 왜군이 당항포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왔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거제도를 돌아서 당항포 근처까지 갔다. 그리고 이순신이 먼저 두 세척의 판옥선을 당항포로 들여보내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때 신기전이 쏘아올려지고 왜선이 당항포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순신의 함대가 장사진을 이루면서 일렬로 당항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순신은 혹시 후방의 방어를 위해서 당항포 입구에 판옥선 4척을 남겨놓았다. 왜군 선단 26척이 당항포의 깊숙한 두호리라는 곳에 정박해 있었다. 왜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을까?
임진왜란 전에 ‘월이’라는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당시 월이라는 기생이 어떤 승려와 동침하였는데 그 승려의 행색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간혹 일본말투가 나와서 몰래 승려의 짐을 뒤져보니 조선 남해 바다의 자세한 지도가 나왔다. 이때 월이라는 기생이 당시 지도의 당항포 근처를 반대편 바다와 연결된 것으로 그려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지도를 갖고 있던 왜적이 당항포를 지나 반대편 바다로 나가려고 들어갔다가 막혀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을 것이고 이때 이순신의 함대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유인작전을 시도하였는데, 26척의 왜선은 지휘관 모리 무라하루(?~1592)를 호위하면서 따라나왔다. 그런데 당시 모리의 함선은 쌍돛을 달고 움직였다. 보통 전투 중에는 (불화살에 대비하여) 돛을 내리는 것이 상식이다. 아마도 이들은 싸우는 의지보다는 빨리 큰 바다로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미 당항포 포구 근처에 이억기의 함대를 매목시켜 놓은 상황이었고, 일본의 수군이 당항포 포구를 거쳐 나오고 있을 때 이순신이 배를 돌려서 학익진을 구사하였고, 마침 매복해 있던 이억기의 함대도 나와서 학익진을 구사하였다. (쌍학익진) 그리고 이순신의 거북선이 일본의 수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때 26척 중에 25척이 수장되었다.
이순신의 부대는 당항포를 나오게 되는데, 이때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에게 외산리 근처에 매목해 있으라고 명령해 놓았다. 새벽에 한 척의 배가 왜군 100여명을 싣고 빠져나오다가 매복해 있던 무의공 이순신의 공격을 받고 아비규환이 되었을 때, 갑자기 원균의 배가 나타나 왜적의 수급을 미친 듯이 베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수급은 쌀 몇가마에 해당했다고 한다. 조정에 올라오는 왜적의 수급은 이순신보다 원균이 훨씬 많았다고 했으니, 아마도 조정에서는 원균이 비록 3척의 판옥선이지만 용맹하게 전투에 임했고, 이순신은 소극적이었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당항포해전, 6월 5일)
이순신의 함대가 당항포 포구를 빠져나와 견내량을 지나 내려오다가 일본의 수군 7척을 발견하고 그들을 쫓아갔는데 (당시 동풍이 불고 있었기에 노젓기는 힘들었을 듯) 일본의 수군은 율포까지 도망쳐서 살려고 육지로 도망치고 있었다. 함포로 배를 작살내면서 화살로 육지의 왜적들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렸다. (율포해전, 6월 7일)
“왜적들은 목이 잘리고 물에 빠져죽어 모조리 섬멸되니 여러 장병들은 속이 다 후련해 했습니다” - 『당포파왜병장』
5월 29일에 사천, 6월 2일에 당포, 6월 5일에 당항포, 6월 7일에 율포에서 왜적을 물리친 조선의 수군은 이후 근처를 뒤지면서 일본의 수군을 찾았으나 이미 다 도망치고 없었다. 이때 이순신은 부산까지 진격할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가덕에서 수색하던 날, 그대로 부산 등지로 가서 적의 종자까지 찾아내어 없애버리고 싶었으나... (중략)” - 『당포파왜병장』
병졸들이 지쳐있고, 군량미도 떨어졌고, 화약도 떨어진 상태여서 훗날을 기약하고 6월 10일 남해 미조항에서 해단식을 가지고 각자 본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순신의 2차 출정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1차 출정 때의 승리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던 조선은 2차 출정 이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도망갔던 지방관들이 돌아오게 되고, 백성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왜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존재를 알게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 접전을 금하라고 명령까지 내렸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수전에 능한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더욱 많은 수군을 확보한 후에 이순신을 잡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수군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이순신을 잡기 위해 한산도를 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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