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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4

[임진왜란32] 함경도를 탈환하다 (Feat. 북관대첩비) 끝까지 보셔야 할 영상 │황현필 한국사 정문부 장군의 하이라이트는 북관대첩(1592.9~1593.2)인데 이 북관대첩은 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면서 승리한 여러 전투를 총칭한 명칭이다. “함경도의 적세는 다른 도보다 강합니다. 안변에서 육진까지 모두 왜장을 배치하고 각기 3~4백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또 민간에 사람을 내보내 필요한 물건들을 날마다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요해처에는 복병을 많이 배설하여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살육과 약탈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모두 분발할 것을 생각하면서 애타게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길주 이북의 상황이 궁금한 일본군은 길주에서 최정예병력 92명을 경성 근처까지 보내보지만, 정문부가 92명을 다 잡아서 죽여버린다(경성전투, 1592.9.16). 장평(장.. 2021. 4. 21.
[임진왜란31] 정문부의 함경도 순왜 척결과 6진 회복(선무1등공신 누구여야?)│황현필 한국사 가토가 함경도를 장악하고 여진족까지 공격했다가 패하고 길주까지 내려왔다가 가장 따뜻한 안변까지 내려가 있었다. 일본군과 왜군? 당시 사료에는 ‘왜군’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왜’(倭)는 일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고, 왜구(倭寇)는 일본의 해적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본(日本)은 7세기 중반 이후 사용된 왜(倭)의 국호(國號)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적을 ‘왜군’이나 ‘일본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함경도는 왜 반역의 땅이 되었을까? 원래 이성계는 함경도에 있는 군사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단종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1453)이 발생하였고, 이때 김종서의 부하였던 6진의 책임자 이징옥(1399~1453)이 난을 일으켰다(1453). .. 2021. 4. 21.
[임진왜란30] 가토(가등청정)의 함경도 점령과 여진족 공격, 그리고 새로운 영웅의 등장 │황현필 한국사 함경도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면서 가장 차별받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함경도의 북쪽에 6진을 개척하도록 하였는데 오늘날의 부령, 회령, 종성, 은성, 경흥, 경원이다.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고 삼남지방의 주민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썼다. 그렇게 해서 함경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과거에 낙방한 사람들이나 땅이 없는 소작인들, 노비들이 나름 혜택(?)을 받기 위해 함경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조선 사람들은 북쪽(4군과 6진)에 사는 사람들이 뿌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함경도로 진출하였는데,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인 이혼은 도망쳐 버렸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15.. 2021. 4. 18.
[임진왜란 24] 의병장 총집합 -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 서산대사, 사명당...그리고 김덕령 │황현필 한국사 이순신은 5월부터 7월까지 총 3번 출정한다. 1차 출정에서 옥포(5.7), 합포(5.7), 적진포(5.8)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2차 출정 때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3차 출정에서는 한산도(7.8), 안골포(7.10)에서 승리하면서 완전히 해상을 장악해 버렸다. 왜군은 육지를 통해 호남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웅치(7.7)와 이치(7.8)에서 황진 장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물러나면서 호남이 지켜졌다. 이순신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고 말했지만,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 호남만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여러 의병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초창기에 일본이 압도적인 승리..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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