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유정2 [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1619년 사르후전투는 동북아의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는데, 그 이전인 1615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명은 예허를 도왔고 우리 백성의 벼 수확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시키지 못할 터, 만일 1천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누르하치는 이전부터 야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예허여진’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만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만.. 2021. 5. 11.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는 아래와 같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한 명의 싸이코(똘아이)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난다. (당시 조선의 인구 20~50%가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렵게 낳은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믿을만한 가신들을 조선 정벌에 참여하게 하였고, 조선을 점령했을 때 영지를 하사하고 나름 가신들의.. 2021. 5. 7.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