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우키타 히데이에4 [임진왜란36] 권율 장군. 구국의 영웅? 최고의 무장?(Feat. 독산성 전투), 13분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권율이 진정 구국의 영웅인가? 최고의 무장인가? 선무1등공신의 자격이 있는가? 임진왜란 발발 이후부터 행주대첩의 승리까지 권율은 뛰어난 활약을 한다. 그런데 행주대첩 이후에 도원수가 된 이후에는 큰 전투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어찌 저런 자가 도원수일까?’라는 언급도 있다. (원래 이순신의 인물평은 냉정하기로 유명하다. 이순신은 그러한 냉정함을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솔직히 권율은 뛰어난 무인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집안이 금수저 집안이었다. 아버지인 권철(1503~1578)이 영의정이었으니 권율은 젊은 시절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술과 여색을 밝히고 여행다니는 거 좋아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40세까지 백수임에도 불.. 2021. 4. 25. [임진왜란35] 걔네들 기준 임난 3대 승리 중 으뜸 - 벽제관 전투│황현필 한국사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두 달만에 평양성을 빼앗겼다가(1592년 6월) 6개월만에 평양성 탈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에서 1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 1만여 명의 수급에는 상당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양성에는 순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되어 이여송이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부대가 절실했던 조선의 조정에서 이여송을 변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고니시의 전투목록은 아래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의 대부분의 전투를 고니시의 부대가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금씩 병력의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18,7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으로 살아돌아갈 때 불과 5.. 2021. 4. 24. [임진왜란16] 히데요시의 분노와 이순신의 잠 못드는 밤 │황현필 한국사 최근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원균이 과연 유능한 장군이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원균은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인 것 같다) 임진왜란 전에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지역에서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 진영을 조율하는 초유사로 임명된다. 이때 김성일은 이렇게 보고한다. “도내에 감사가 없으니 모든 적변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지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2021. 4. 10. [임진왜란5] 부산성 전투 - 흑의장군 정발(오사카성VS창덕궁, 일본군단 해부) │황현필 한국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 정벌을 꿈꾸었을 때, 당시 본진은 교토였으며,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쿄’(당시에는 오지)로 쫓아낸 상태였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7년 전쟁’(1592~1598), ‘조일전쟁’이라고도 하는데, 명나라는 명나라는 ‘항왜원조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다이묘의 생각은? 조선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도 내색을 하지 못했다. (토요토미에게 걸리면 조선으로 건너가기 전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가장 가까운 지역에 나고야 성을 축조(오늘날에는 없음)하였다. (일본의 오사카와 도쿄 사이에 있는 나고야에 있는 성과 다름) 참고로 나고야는 오사카와 도쿄 사이에 있는 도시이다. 오사카(한신.. 2021. 3. 19.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