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김옥균2 [근대14] 젊은 친구들은 왜 개혁을 꿈꿨나? [근대14] 젊은 친구들은 왜 개혁을 꿈꿨나? 대원군 집권이 끝나고 민씨척족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되었고, 1880년대에 개화정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부정부패, 민씨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1) 개화정책이 중단되었고, 2)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며, 3) 민비는 장호원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압송하면서 민비는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당연히 청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재정고문 마젠창,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군사고문 위안스카이).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주둔(1882년 제물포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개화론자들은 박규수(1807.. 2021. 6. 22.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1880년대 초반 개화 정책으로 의정부와 6조 사이에 개화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었다. 그리고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여 구식군대로 개편하고, 신식군대로 별기군을 창설한다. 조사시찰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영선사를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에는 국고가 탄탄했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민비는 모자란(자폐증세가 있는) 순종의 건강을 위해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살을 투하하고, 고종은 매일 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국고를 탕진하기 시작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하루에 왕과 왕비가 쓰는 돈이 천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이 10년간 비축한 재산을 고종과 민비가 1년만에 탕진한 .. 2021. 6. 20.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