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8] 탄금대 전투 - 신립은 대체 왜? 이와중에 혼자 살아남은 1인? (아~조령과 문경새재)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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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8] 탄금대 전투 - 신립은 대체 왜? 이와중에 혼자 살아남은 1인? (아~조령과 문경새재)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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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출정한 일본의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서 밀양을 거쳐 대구를 격파하고 상주로 진격하여 조령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를 거쳐 죽령으로전진하고 있었으며, 3선 발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는 김해를 공격하면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역제도는 오랜 기간 평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방력은 약하지 않았다. 세조가 만든 보법제는 31조로 구성되었으며, 한 명이 정군으로 선정되면 나머지 두 명의 경비를 충당하는 체제였다. 조선이 기본적으로 양인개병제였으나 양반과 상인, 중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병사로 차출되지 않았으며, 농민들만 병사로 차출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병농일치).

 

당시 군역 말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요역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면서 군역의 요역화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대신 군역의 의무를 지는 대립제가 성행하였다. 이때 지방관이 대신 군역에 동원될 사람을 찾아주는 방군수포제가 시행되었으며, 죽은 자에게 군역을 부담시키는 백골징포’,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담시키는 황구첨정이 횡행했다.

 

중종 때 이러한 군역의 폐해를 막고자 군적수포제를 실시하였다. 국가가 군포를 거둬들였으면 그것으로 군대를 양성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이 같은 사람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의 제승방략체제의 허술함이 신립과 이일의 활약(?)으로 드러나게 되어 조선은 훈련도감이 생겼다(살아남은 이일이 훈련도감의 지휘관이 되기도 한다).

 

 

한양에서 신립이 군대를 모집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때 유성룡(1542~1607)이 몇 백의 병사를 모아놓고 있었다. 유성룡이 모아놓은 군대에는 김여물(1548~1592)이라는 무력이 출중한 장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원래 문과 급제자였는데 송강 정철(1536~1593)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정철이 세자 문제로 물러나면서 서인이 몰락하자 감옥에 있었는데 유성룡이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송강 정철의 사람인 김여물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신립은 김여물도 데려가기를 원했다. 김여물은 신립을 따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립을 따라가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건너게 된 조령은 상당히 험한 지형이었으며, 문경새재는 한 명의 병사가 백 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신립은 여진족 이탕개의 난(1583)을 진압한 인물이다. 그는 충주 벌판에서 기마전으로 일본을 박살내려고 했다. 왜냐하면 조선에 상륙한 왜군이 기마병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고, 여진의 기마병도 박살냈는데 왜군의 기마병쯤은 누워서 떡먹기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주에서 왜군을 경험한 이일은 왜군의 전력이 심상치 않다고 말하며 게릴라전으로 조령에서 왜군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여물도 조총을 소지한 왜군에게 기마전을 전개하지 말자고 조언하였다.

 

물론 신립의 입장에서 조령으로 들어가서 고니시의 부대를 막게 되면, 가토나 구로다의 부대는 한양으로 곧장 진격을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우선 탄금대에서 고니시를 격파하고 이후에 가토와 구로다의 부대와 상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1549~1598)도 문경새재를 보고 신립이 바보같은 전법을 썼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병력의 손실이 너무 아쉬웠다.

 

험난한 문경새재를 건너는 일본군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을 맞이한 신립...

 

신립의 기마병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고 조총부대를 포위해서 섬멸하려고 했는데, 당시 날씨도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비가 오는 상황에서 논밭에서 말들이 허우적거렸고, 말 위에서 궁기병들이 활을 제대로 쏠 수 없었다. 그리고 조총부대가 양 옆에서 사격을 하면서 전세가 일본쪽으로 기울었다.

 

신립은 끝까지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구초대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일본의 회본태합기의 삽화에 등장할 정도인 김여물 장군은 도끼를 휘두르며 순식간에 십여 명을 작살냈다. 그러나 역시 중과부적으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회본태합기] 김여물 삽화

 

이때 신립의 부대 8천이라는 기록도 있고 16천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공을 부풀리려는 의도로 8만이라는 과장된 주장도 있다(루이스 프로이스). 신립의 부대는 거의 전멸했는데, 이일은 여기서도 살아남았으며 한양으로 도주하다가 도중에 누군가를 죽이고 그의 목을 가지고 가서 왜군의 목이라고 보고한다.

 

조선의 정규군과의 전투를 앞둔 왜군은 솔직히 긴장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극심한 공포감에 떨었다고 한다. 그런데 탄금대에서 말도 안되는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조선의 정규군이 전멸당하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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