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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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by [수호천사] 2021.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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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칠천량해전(1597.7.15~16)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일본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일본군은 처음으로 전라도로 진격해서 남원성을 점령(1597.8)했다.

 

[칠천량해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

 

『난중일기 7월 18일』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하였습니다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하였다. 오전 10시께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어떻게도 의견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해안 지역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하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반가워하였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삼가현에 이르니 새로 부임한 수령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도 와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중일기 7월 21일』
맑다.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렀더니 군수 이천추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도 고을에 많이 남아 있어서 일찍 익은 벼를 거두기도 하고 밀보리 밭을 갈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렀더니 거제 현령 안위(1563~1644)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경상 수사(배설, 1551~1599)는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하여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칠천량해전 패배 소식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다>

 

『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
상이 말하기를, “한산을 고수하여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형세를 만들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중략) 이번 일은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자기가 이순신에게 무리한 출정을 강요했고, 이순신을 파직시켜서 원균에게 수군을 맡겼고, 도원수 권율에게 왜 원균을 컨트롤하지 못하냐고 압박을 줬으면서 너무 뻔뻔한 선조... 결국 조선의 조정은 조선의 수군을 담당할 인물로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된다. 

 

<1597년 8월 3일 선조의 기복수직교서를 받다>

그대는 일찍 수사 책임을 맡았던 그 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로 업적이 크게 떨쳐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건만,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한 것은 역시 사람이 생각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중략)
또 왕손이 죄인의 이름으로 일어나 능히 적을 소탕하는 공을 세운 것 같이,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굳건히 하여, 나라 건져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며 이제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알지어다.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을 내친 것을 후회하며 어머님 상중인 그를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는 내용.

 

 

이순신은 기복수직교서를 진주 손경례 가옥에서 받았다. 이 교서의 마지막 부분에 중국의 왕손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공을 세운 것처럼 이순신도 죄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진주 송경례 가옥

 

원래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이다. 그런데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면서 정3품으로 두었다. 당시 경상 수사 배설(1551~1599)이나 전라수사 김억추(1548~1618)가 정3품이었기에 명령체계는 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이순신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가 된 후 단 한 번도 망궐례(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가서 왕을 배알하지 못하고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유교의례)를 드린 적이 없다. 이순신은 왕인 선조가 아니라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성을 위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 전쟁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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