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 조선에 이순신이 있음을 알게하다(1차출정-옥포.합포.적진포해전)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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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 조선에 이순신이 있음을 알게하다(1차출정-옥포.합포.적진포해전)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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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군은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다. 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펼친다. 왕의 입장에서 전라도의 오른쪽이 오늘날 전라도의 서쪽이 되고(전라우수영), 왼쪽은 전라도의 동쪽이다(전라좌수영). 마찬가지로 경상우수영은 경상도의 서쪽, 경상좌수영은 경상도의 동쪽이다. 가장 규모가 적은 곳이 ‘전라좌수영’이다.

 

 

전라좌수영은 55포로 구성되어 있다. 관할지역에 이라 함은 고을이라고 할 수 있고, ‘포구ㆍ항만ㆍ기지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수시로 55포를 순시하여 전쟁준비가 잘된 고을은 칭찬하고 격려하고 전쟁준비가 덜된 고을은 지적질해서 개선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배는 1555년 을묘왜변까지 맹선이 사용되었다. 이 맹선을 조금 개량한 것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을 잘만 활용하면 일본의 수군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이순신은 생각했던 것이다.

 

“왜란은 개전 초에 막을 수 있었다”는 이순신의 증언 :
“지난날 부산과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만약 전선과 노를 잘 정비하여 바다 가득히 진을 치고 있다가 왜적의 배들을 들이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와 힘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적절히 병법대로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써 적들이 뭍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하는 한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원경상도장>

 

후에 이순신이 모함을 받았을 때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원균과 박홍 같은 사람이었다.

 

선조가 428일에 원균과 합세해서 싸우라고 하지만 상황을 가려서 싸울지 말지를 결정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순신은 430일까지 전라우수영의 이억기에게 와달라고 요청했으나 53일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낯선 경상도 바다로 진출해서 싸울 것인지에 대해서 부하들과 많은 논의를 했지만 “경상도 바다도 우리 바다다”라는 결론으로 54일에 단독으로 출정을 하게 된다.

 

이때 이미 경상도가 왜군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경상도 수군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도 모르고, 경상도 바다에 왜군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싸우러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이때 출정하는 병사들과 관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눈물의 출정식을 거행하였다.

 

여수를 떠나 경상도 관할의 남해도에서 병력을 충원하려고 했으나 이미 고을 현령은 도망쳐 버린 상황이고 백성들은 다 피난가 버렸다. 55일에 소비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6일 당포 근처에서 원균과 만났다. 이때 원균은 단 한 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나타났다. 원균은 전쟁 초기에 수십척의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고 도망치기 쉽게 자신의 판옥선에 함포도 버리고 노를 젓는 사람들만 데리고 도망친 것이다. 이후 경상우수영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병사들을 포함해서 4척의 판옥선이 합류하게 된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의 기록 :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대적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전선과 무기들을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군 1만여 명을 흩어버린 다음, 단지 옥포 만호 이운룡, 영등포 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순신의 판옥선 24척과 경상우수영 판옥선 4척을 합쳐서 28척의 판옥선이 경상도의 바다를 이동하였다. 이순신은 이동하면서 섬마다 척후병을 보냈고, 상대적으로 빠른 포작선(고기잡이 배)으로 주변을 수색하게 하였다(왜선을 발견하면 신기전을 쏘아올리도록 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거제도를 돌아서 옥포 근처에서 왜선 수십척을 발견하였다. 이미 왜구들은 거제도에 상륙해서 약탈중이었다. 이때 옥포의 왜장은 도도 다카토라(1556-1630)였다. 당시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젊은 신진 세력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도도 다카토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이었고 이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면서 32만석을 차지한 다이묘가 된다. 그는 일본의 오즈성을 비롯하여 에도 막부에서 만든 여러 성을 관리했을 정도로 성을 축조하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일본군은 나름 조총의 위력을 믿고, 백병전에 능숙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지세는 불리하지만 맞짱을 떠보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배가 멈추고 함포사격을 시작하면서 일본군은 멘붕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일시집중타’(순수 함포전)로 일본군 함대 26척을 수장시켰으며, 이순신은 빠른 협선들을 전진시켜 불화살에 발화탄을 매달아 쏘게 하였다. 도도 다카토라는 간신히 도망쳤다. 이것이 5월 7일의 옥포 해전이다.

 

 

조선의 판옥선과 일본의 안택선을 비교하면, 소나무나 참나무를 나무못으로 만든 판옥선은 삼나무를 쇠못으로 만든 안택선과 비교해서 내구성이 튼튼한 반면 스피드에서는 뒤진다. (일본 수군이 도망치면 판옥선으로는 따라잡지 못한다) 판옥선이 느리고 무거운 반면 제자리에서 선회할 수 있어서 옆으로 돌아서 함포사격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안택선은 제자리에서 선회하기 어렵다. 판옥선은 갑판이 함포의 진동을 견딜 수 있지만 안택선은 함포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판옥선의 장점을 이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활쏘기 훈련을 자주 시켰다고 한다.

 

옥포에서 승리한 조선의 수군은 남포 근처에서 왜선 5척을 발견한다. 왜선 5척이 합포쪽으로 도망쳐서 스스로 독 안에 든 쥐 상태가 되었고, 이순신의 수군은 합포에서 여유있게 왜선을 격침시켰다(5월 7일, 합포해전). 그리고 합포에서 나와 남포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58일 남포를 출발해서 지금의 통영(혹은 고성) 근처인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발견하고 가볍게 승리(5월 8일, 적진포해전)한 이순신은 원균과 헤어져서 미조항을 거쳐 58일 늦은 저녁에 여수(좌수영)으로 돌아온다. 이날(58)을 기념하는 여수의 축제가 여수 진남제이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장계를 함께 써서 올리자고 했는데 염치가 있는 사람인가? 이때 조정에 올린 장계가 옥포파왜병장으로 이순신은 이후 적의 수급에 연연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대신 장계를 올릴 때 부하들의 활약을 자세하게 기록해서 올리게 된다. 그런데 원균은 이후 이순신을 따라다니면서 적의 수급을 베는 것에만 급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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