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에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32세)은 그해 함경도 삼수고을 동구비보 권관(종9품)이라는 말단 관직으로 가게 되는데 함경도 감사 이후백이 활쏘기 시합을 했을 때 활을 잘 쏘아서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35세, 어릴 때 살았던 훈련원봉사(종8품)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전랑’은 ‘정랑’과 ‘좌랑’으로 구분되는데 ‘인사권’을 담당하고 있었다. (병조정랑이라고 하면 쉽게 말해서 군대의 인사권을 관리하는 직책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병조정랑인 서익(5품)이 이순신에게 부당 인사를 청탁하였으나 이순신이 거부한다. (나중에 서익이 이순신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35세 때 충청병사 군관을 역임하였는데 청렴결백하게 지냈으며, 당시 받은 급료를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36세 때 고흥 발포 만호(종4품)에 임명되는데 (이것은 오늘날로 따지면 대령급) 당시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에 있는 오동나무로 자신의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요청하는 것을 거절함... 이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손식이 이순신을 불러 대면했는데 병서에 능한 이순신을 보고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다. 이후 성박 후임으로 좌수사에 임명된 이용이 이순신에 대해서 (성박에게 들은 것을 바탕으로) 괘씸하다고 생각해서 발포를 불시점검하게 된다. 그런데 이순신의 발포가 다른 포들보다 가장 준비가 잘된 상황이라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 이용은 이후에 결국 이순신에게 매료된다. (나중에 이순신이 힘들어할 때 이용이 끌어당겨준다)
이순신과 악연이 있던 서익(병조정랑 때 청탁거절)이 임시검열관으로 내려와서 이순신은 생애 첫 파직을 당한다. 그래서 1년 정도 백수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38세에 훈련원봉사(종8품)으로 강등되어 관직생활을 재기한다. 이때 이순신에 대한 소문은 어느 정도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율곡이 자신과 같은 덕수 이씨라고 해서 유성룡을 통해서 한번 만나자고 요청했으나 거절한다. 나이로는 6살 율곡이 많았으나 항렬로 따지면 이순신이 한칸 위였다. (지금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율곡을 만날 수 없다고 함) 그리고 당시 국방부장관격인 병조판서 유전이 이순신의 화살통을 갖고 싶어하는데 이순신은 ‘대감과 나의 명성이 이 화살통 하나로 더럽혀져서야 되겠습니까?’ 라며 거절하였다.
39세 때 위에서 언급한 이용이 함경도 남병사로 발령받게 되었을 때 군관으로 함께 가게 되어 ‘경원 건원보 권관’이 된다. 이때 여진족이 침략했을 때, 여진족의 ‘울지내’를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당시 북병사 김우서가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여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움직였다고 해서 상을 받지 못하였다. 아버지 이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청도 아산(조상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 내려간다. 당시 아산으로 내려가는 이순신의 건강을 함경도 순찰사였던 정언신(1527~1591)이 걱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3년상을 치루고 42세에 사복시주부(종6품, 궁궐내 말을 키우는 직)를 거쳐 함경도 경흥 조산보 만호(종4품)으로 승진한다. 바로 여기에서 유명한 ‘녹둔도 전투’(1587)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 과정에서 ‘이일’(임진왜란 당시에 도망왕)과 대립하게 되고 백의종군을 당하게 된다.
다시 45세 때 전라도 감사 이광의 군관 겸 조방장(종4품)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어서 정읍현감(종6품)이 된다. 이전까지는 최전방으로만 다니던 이순신은 품계는 낮지만 정읍현감이라는 안정적인 자리(오늘날의 군수나 시장)로 가게 된 것이다. 그나마 가족의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형 둘이 죽게 되고 이순신이 상주가 되었을 때, 유성룡이 이순신의 집안이 걱정되어서 이순신을 현감으로 보낸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형들의 가족들을 챙긴다. 이때 정언신이 정여립 모반사건(1589)에 의해서 파면되었다. 당시에 선조가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에 감히 감옥에 있는 정언신을 찾아가면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정언신을 찾아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유능한 장수들을 남쪽으로 내려보내는 과정에서 이순신이 언급되었지만 갑작스런 승진은 문제가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유성룡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진도군수(종4품)으로 승진시키고, 일주일 후에 가리포진 첨사(종3품)으로 발령을 내었으며, 곧바로 전라좌수사(정3품)으로 발령을 내면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함경도의 ‘녹둔도 전투’(1587)로 이순신의 능력을 조정이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
유성룡 :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정해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뱃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어 자신을 잊고 국난에 몸을 바쳤으니, 이는 평소 수양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이민서 : “공은 평소에는 차근차근해서 단아한 인품이 마치 선비와 같았다.”
이식 : “공은 비록 무부(武夫)들과 사귈망정 기상이 높고 조용하고 침묵했다. 동료 무부들이 종일 실없는 말로 서로 희롱하면서도 감히 이순신에게는 하지 못했다.”
'[영상 & 유투브] > [황현필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15] 조선에 이순신이 있음을 알게하다(1차출정-옥포.합포.적진포해전) │황현필 한국사 (0) | 2021.04.10 |
---|---|
[임진왜란14] '녹둔도 전투'(이순신 장군의 역사무대 데뷔전) │황현필 한국사 (0) | 2021.04.08 |
[임진왜란12] 이순신의 조상, 출생, 어린시절, 청년기와 과거 합격 │황현필 한국사 (0) | 2021.04.06 |
[임진왜란11] 이순신 │황현필 한국사 (0) | 2021.04.05 |
[임진왜란10] 임진강&대동강 방어전(광해군 분조를 이끌다)-절대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0) | 2021.03.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