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덕수 이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의 시조인 이돈수가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입 때 출정했던 것으로 보아 무인의 기질을 타고 났다는 말도 있다. (10대조 이양준도 무관이었음) 이순신의 5대조 이변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뛰어난 인재였다. 후에 선조가 유성룡에게 이순신의 집안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유성룡은 이렇게 대답했다. “성종 때 이거의 증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선조가 금방 알아들었을 정도로 ‘이거’라는 사람은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당시 임금이었던 중종이 죽었을 때 아들 이정을 결혼시키고 잔치를 베풀어서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덕수 이씨와 초계 변씨는 아주 가까운 집안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사회는 ‘모계중심사회’였다. 예를 들어 이이는 파주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안이 있는 강릉 오죽헌에서 살았다. 그리고 재산도 모든 자녀에게 균등하게 분할 상속하는 것이 조선 전기의 상황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 ‘문중(門中)’, ‘종중(宗中)’,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중시하는 것은 17세기 이후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이순신의 외할아버지가 현감이었기에 몰락 양반은 아니고 그냥 괜찮은 가문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4형제를 낳았는데 중국의 성군의 이름을 따서 차례대로 이름을 지었다. (희, 요, 순, 우) 따라서 이순신은 셋째 아들이다.
이순신이 태어난 곳이 한양 건천동인데 이곳은 훈련원 근방이라,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은 전쟁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에 원균역시 건천동에서 살았는데 나이가 5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함께 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균의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우선 결혼 전에 문과 시험을 준비하였는데, 당시 조선에서 문과에 합격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장면 중에 궁궐에서 얼쩡거리는 관료들은 오늘날로 따지면 천재급의 머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3년에 한 번 있는 과거시험에서 33명을 선발하는데, 당시 경쟁률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과거제도로는 정기적 시험을 보는 식년시(3년에 한번)와 비정기적으로 보는 별시,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이순신은 보성군수 방진의 외동딸과 결혼한다. 보성군수 방진은 무인 출신이기 때문에 이후 이순신이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순신은 무과 시험 도중에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시험을 보는 집념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낙방하게 된다)
이후 다시 무과에 응시하는데 지역선발을 겸하는 초시를 통과하고 복시를 통해서 28명이 선발되고, 왕 앞에서의 순위결정을 통해서 갑(3인), 을(5인) 병(20인)이 가려지는데 이순신은 12등으로 합격한다(이순신 당시에는 동점자가 있어서 최종 29명이 합격). 이러한 무과시험이 워낙 경쟁률이 높았기 때문에 무과시험을 통과한 조선의 장수는 어지간한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당해내지 못하는 무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선산에 있는 망부석을 혼자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이 가장 잘하는 것은 활쏘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무과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34세임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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