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여운형4 [대한민국수립11] 해방정국,,, 우리에게는 그래도 여운형이 있었다. [대한민국수립11]해방정국,,, 우리에게는 그래도 여운형이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우익은 반탁(비상국민회의), 좌익은 찬탁(민주주의민족전선)을 주장했다. (그런데 먼 훗날에는 찬탁과 반탁으로만 가르치지 말고 분단과 통일을 함께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너무 간단하게 찬탁과 반탁의 프레임으로 이야기하면 아직도 ‘찬탁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많이 있기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휴회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잘못하면 분단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민족지도자들에게 있었지만 그 누구도 ‘분단’이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분단’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다(정읍발언, 1946.6) 이승만의 .. 2021. 5. 29. [대한민국수립10-2] 김구의 치명적인 실수 2편 [대한민국수립10-2] 김구의 치명적인 실수 2편 김구 선생이 반탁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손을 잡은 것은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였을 것이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과 병행하여 진행했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따랐던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이 반탁운동을 하게된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김구의 반탁운동과 이후 이승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당시 정황에 대한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계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어쩌면 남한의 대통령을 이승만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김구의 능력 부족 때문일 지도 모른다. 김구는 베트남의 호치민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3~5)에서 소련은 반탁운동을 하는 세력을 배제하자고 어거지를 부렸고, 미.. 2021. 5. 28. [대한민국수립8-1] 찬탁이 옳아? 반탁이 옳아?(Feat. 검찰개혁이 옳아? 조국사퇴가 옳아?) 1편 [대한민국수립8-1] 찬탁이 옳아? 반탁이 옳아?(Feat. 검찰개혁이 옳아? 조국사퇴가 옳아?) 1편 해당 영상을 촬영할 당시에는 검찰개혁으로 서초동(촛불집회)과 광화문(태극기집회) 나뉘었다. 그리고 70여년 전의 해방 당시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을 이야기한다. 8월 15일 해방이 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지는 못했다. 다음날인 8월 16일에 휘문중학교에서 여운형과 수천명의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 여운형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익 민족주의 계열과 연대할 생각이 있었던 인물이다. 중도 좌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은 당시 중도 우익이라고 할 수 있는 안재홍과 함께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전국의 145개 군에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9월에 .. 2021. 5. 25. [대한민국수립7] 해방 당일 그놈 목소리(Feat.여운형, 히로히토, 맥아더) [대한민국수립7] 해방 당일 그놈 목소리(Feat.여운형, 히로히토, 맥아더) 여운형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여운형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중고등학교에서 그다지 자세하게 가르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실제로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여운형에 대한 수능 출제까지 제한했다고 한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 전에 1918년에 신한청년단이 만들어진다. 신한청년단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보내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신한청년단의 대표가 여운형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여운형은 조선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에 일본 왜왕과 독대했던 인물이다. 일본 왜왕에게 식민통치에 대한 부당함을 당당하에 이야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의 패망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을 때, 조선총독부.. 2021. 5. 25.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