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고언백2 [임진왜란39] 한양 탈환, 쟤들 살려 보내야해?(feat.정걸의 용산 식량기지 박살과 고언백의 노원평 전투)│황현필 한국사 평양성을 빼앗기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후퇴하였고, 나머지 일본군도 한양으로 모여들어서 한양에는 5만이 넘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한양에 있을 수 없었다. 왜 그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을까? 1. 군수 물자 및 보급품 부족 : 이미 이순신에 의해서 남해의 제해권이 장악되고 한양에 남아 있는 일본군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 일본군의 막대한 병력 손실 : 여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일본군은 22만에서 1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10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3. 장기전에 지치고 병든 일본군 4. 명군의 참전 : 명나라 해안을 노략질하면서 경험한 무능한 명나라 군사들이 아니라 요동과 절강성의 정예부대를 경험한 후에 일본군은.. 2021. 4. 25. [임진왜란35] 걔네들 기준 임난 3대 승리 중 으뜸 - 벽제관 전투│황현필 한국사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두 달만에 평양성을 빼앗겼다가(1592년 6월) 6개월만에 평양성 탈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에서 1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 1만여 명의 수급에는 상당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양성에는 순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되어 이여송이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부대가 절실했던 조선의 조정에서 이여송을 변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고니시의 전투목록은 아래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의 대부분의 전투를 고니시의 부대가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금씩 병력의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18,7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으로 살아돌아갈 때 불과 5.. 2021. 4. 24.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