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와 자유시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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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홍범도와 자유시참변

by [수호천사] 202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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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와 자유시참변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행사를 참석했다. 당시 중국과 외교는 중요했기 때문에 잘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중국은 동북공정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중국은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통일을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나라이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맞이하는 꼴을 보기 싫은가?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78년만에 이땅에 돌아온 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한가? 홍범도가 사회주의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국가 만들자는 건 미친놈이다. 사회주의 사상은 사상적으로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사상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할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방략의 차원으로 받아들였고, 독립운동의 상당수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러한 독립운동가를 칭송하면 빨갱이가 되고, 독립운동가를 손가락질하면 애국자가 되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독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계급투쟁에만 관심을 가진 소아병 사회주의자들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민족주의자들이 다 친일파는 아니지만 친일파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계열에서 나왔다.

 

당시에 홍범도 장군이 맑시즘이나 자본론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레닌을 만났고 권총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레닌은 사상가였지만 그 이후 스탈린(1878~1953), 마오쩌둥(1893~1976), 김일성(1912~1994) 등의 독재자들이 문제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일본과 싸우는 과정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손을 잡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으로 러시아가 공산화가 되고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식민지 해방선언을 한다.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를 확장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당시 일본과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군의 입장에서는 무기를 주고 군량미 주고 지원금까지 주는 레닌과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보수 유투버들은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최소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들여다보고 찾아보는)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봉오동 전투가 부풀려졌다고 보수 유투버들이 주장한다. 157명의 일본군이 죽은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의 기사이다. 홍범도가 삼둔자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죽이고 봉오동으로 유인해서 157명을 죽였다. 이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봉오동 전투, 1920.6)

 

 

이후 일본은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의 독립군을 공격할 명분을 찾는다. 중국의 마적단을 매수해서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였고, 이것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홍범도를 잡으려고 출동한다. 이후 홍범도와 김좌진이 청산리 근처에서 10여차례 전투를 통해서 일본군 1,200명 정도를 사살한 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일본은 청산리에서의 패배 이후에 간도참변(1920.11~1921.4)을 자행해서 민간인을 학살한다. 이후 간도 지역의 주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과정에서 독립군들은 그들을 위해서 간도를 떠나는 선택을 한다. 이때 밀산부 한흥동까지 가게 되고 192012월에 서일,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사회주의 세력인 적군이 로마노프 왕조의 부활을 꾀하는 백군과 그들을 지원하는 일본군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인 독립군들에게 러시아에 들어와서 함께 일본과 싸우자는 제안을 하였다(무기와 군량미를 제공하겠다고 제안). 이때 독립군들은 자유시로 건너간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의 극동지역에서는 무기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 부담되어서 반대를 하였고, 러시아의 농민들과 독립군들이 마찰을 일으켰다.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 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4-55

 

치타에서 귀하와 함께 한인사할린빨치산부대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부대는 자신의 활동으로 지역 농민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농민과 한인들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이 주된 원인은 부대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며, 그것을 제거하기란 전박적 식량위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부대장의 부재 또한 그 원인입니다. 상황 악화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다른 인접지역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 및 예정대로 신속한 부대 이전을 위해 칼란다리시빌리 동부의 조속한 출발을 요청합니다.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 선인, 177쪽

 

러시아에서는 상해파(대한의용군)와 이루크츠크파(고려혁명군)가 어디를 중심으로 통합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홍범도는 누가 중심이 되어 통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통합 이후에 일본과 싸우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이범석과 김좌진은 이탈해서 남으로 내려갔다) 다수가 이루크츠크파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상해파가 무장해제를 하지 않자 소련군(고려혁명군 일부)이 대한의용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한의용군의 허재욱이 이끄는 의군부 부대가 많이 죽게 된다.

 

자유시참변 사상자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론 사망자가 36,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총 600여 명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허재욱의 의군부 병력을 고려했을 때 학계에서는 사상자 600명은 비현실적이라고 봄)

 

홍범도 장군 관련 4가지 거짓말

  1. 봉오동 전투는 부풀려졌다.
  2. 자유시 참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우익 독립군을 죽였다.
  3.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가 독립군을 죽였다. (홍범도가 고려혁명군을 지지하긴 했지만 참변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홍범도, 안무, 지청천 등은 자유시에서 3km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4.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투쟁이 중단되었다.

 

역사를 공부할 때, 방정식도 모르면서 미적분을 풀려고 하는 격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해방 이전까지 만주와 중국에서는 끊임없는 무장투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 중국인들조차 우러러보는 양세봉 장군 같은 사람도 있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만주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조직해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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