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40대에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신동아 특집(1999.11)
삶은 각 시점마다 독특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40이라는 나이는 아마 8월 말이나 9월 초쯤의 들판과 같다. 여름처럼 푸르고 뜨거울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푸르고 뜨겁다. 여름은 오만하다. 오만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푸르고 뜨거울 수 있겠는가 ? 이때 푸르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푸르러 볼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숨 가쁘게 뜨거워 보기도 힘들 것이다. 마흔 번도 넘는 계절의 순환을 겪으며 내가 느낀 것은 여름이 없이 가을도 없다는 것이다. 좋은 여름만이 좋은 가을을 만든다. 그래서 곧 잘 초초해 지고 절박해 지는 것이 바로 마흔이 넘어선 지금이다. 마지막 며칠간의 그 뜨거운 여름을 과일 속에 담아 넣기 위해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 하는 기원은 비단 릴케(Reiner Maria Rilke)만의 통곡이 아니다.
독일의 민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내 목숨의 길이를 알 수 없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
나는 가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른다.
그리고도 나는 태평스럽다.
놀라운 일이다.
태평스럽게 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이제 그만한 소시민적 평화를 바라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 시작한 직장에서 적당한 자부심을 느끼며 평생을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드문 은총이 되고 말았다. 어디에도 적절한 자리가 없는 것이 지금의 40대이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갈림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게 되면 후회하게 되리라.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지점이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작점에서 나는 스스로를 한 달간 유폐시켰다.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기 위해 포도만 먹으며 한 달을 보냈다. 나를 절박하게 몰아가기 위해 상징적인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안쪽 깊은 곳에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 아직 며칠 더 절실하게 푸르를 수 있고 뜨거울 수 있다. 살면서 한 가지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오만을 떨 수 있는 며칠이 남아 있다. 겸손한 가을이 오기까지 아직 조금 시간이 있다.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는 열매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찬란한 여름의 며칠이 남아있다. 지금은 그래서 내게 아주 절박한 시기이다. 모든 40대의 사람들처럼.
변화는 절박함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절박함을 스스로에게 설득시킬 수 있다면 변화의 반은 성공한다. 그러나 절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바꾸는데 성공할 수 없다. 이 점이 변화의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한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변해야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데 실제로 변하기는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나는 그들에게 절실하냐고 묻는다. 절실하다는 것은 그것을 생존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이 결단의 시기이며,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라는 자기 암시이며 주술이다.
나는 담배끊기를 예로 많이 든다. 담배를 끊기는 어렵다. '독한 놈'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의사가 " 당신, 암입니다. 담배끊고 치료 시작합시다. 나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래도 부득부득 담배를 계속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 사람이 '독한 놈'이 된다.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면 변화는 시작된다. 40이 넘은 사람들에게 이제 여름은 며칠 남아 있지 않다. 변화의 절박함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다.
절박함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 자발성은 변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변화는 움직임이다.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움직여가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에는 한 순간에 적어도 두 개의 점이 필요하다. 지금 서 있는 곳과 도달할 목적지를 나타내는 두 개의 좌표를 찍을 수 있어야한다. 두 좌표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이 바로 변화의 폭이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두 점 사이에는 늘 시간이 개입되어 있다. 두 점 사이의 차이는 우리에게 압력을 가한다. 옮겨가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곳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도달해야하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바로 떠나야할 시각을 결정한다. 떠나야할 시각에 떠나지 못하면 원하는 시각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계절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듯이 삶 역시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여름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직 쭉쟁이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채워줄 햇빛도 뜨거움도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에게는 가을이 없다. 걷어들일 인생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일을 당해버린 사람에게는 절박함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을 겪은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을 뿐이다. 암에 걸린 다음의 건강, 다 지나 간 인생의 뒷전에서 깨달은 진정하고 싶었던 일 하나, 등을 돌리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애인은 후회일 뿐 절박함이 아니다. 절박함은 약속 시간에 맞추어 그 곳에 도착하기 위해 급히 집어탄 택시 안에서 생겨나고, 급한 발걸음 속에 존재한다. 아직 약속한 그 곳에서 애인이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절박함은 아직 희망이 있을 때 찾아온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바로 희망을 이루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이다. 모든 관심과 능력을 집중하게 한다. 그것에 모든 것을 걸게 한다.
상징적으로 변화를 규정하는 두 개의 점은 '현실'과 '꿈'이다. 출발점이 도착점 보다 못한 변화는 부정적인 변화이다. 개인에게 이런 변화는 불행이다. 현실 보다 낮은 수준의 꿈을 꾸는 사람은 없다. 경제적으로 혹 지금보다 당장 벌이가 못한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다른 점에서 그 만큼을 보상할 수 있기 때문에 취해진다. 더 나은 경제성을 위한 준비 기간일 수도 있고, 혹은 개인의 내면적 만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꿈은 늘 현실을 떠남으로 도달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이버 리얼리티(Cyber Reality)이다. 꿈이 이루어지는 않는 이유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꿈을 이루는 데 여러 번 실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그들은 꿈을 이루게 된다.
절박함은 그러므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생겨난다. 현실과 꿈 사이의 간격에서 꿈을 향해 움직여갈 때 생겨난다. 현실밖에 없는 사람은 절박하지 않다. 그들에게 삶은 그저 지루하고 짜증스러운 반복과 연속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꿈, 즉 도달해야할 점이 없다. 오직 현실이라는 한 점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외부의 변화가 밀려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후회할 뿐이다. 그런가하면 꿈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들도 변화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현실이 없기 때문에 '이룬다'는 개념도 없다. 그저 취해서 살 뿐이다. 변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늘 '또 하나의 점'이 필요하다. 그것도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찍은 '또 하나의 점'이 중요하다. 스스로 찍지 못하면 대대의 경우, 다른 사람들이 찍어 놓은 곳으로의 이행을 강요당하게 된다. 강요된 스피드로 강요된 곳을 향하여 몰려가지 못하면 도태되거나 원하지 않은 곳에 도달하게 된다.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바로 이 비자발성에 기인한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꿈꾸는 곳으로의 이동은 힘든 과정이다. 그 간격을 극복하는 것은 산을 오르듯 높은 곳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힘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모든 자연 속에 신이 존재하듯이 신은 우리의 속에 있다. 그래서 힘은 안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졌고, 우리가 곧 부처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스스로 오만해 질 수 있는 이유이다. 자기를 세우지 않고는 자기를 찾을 수 없다. 스스로 머리 깎고 벽 앞에 앉지 않고 공부가 시작되지 못하며,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을 내딛는 시퍼런 마음 없이 정진할 수 없다.
안으로부터 오는 힘은 단지 의지와 인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고 견디는 것은 고통스럽다. 자기의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름으로 그 내면적 힘을 얻어낼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수련과정에 포함되는 반복과 연습, 그리고 땀은 자부심을 높혀 주고 행복하게 해준다. 강수진은 올해 32살이다. 세계 최고의 무용수 중에 하나이다. 그녀는 하루에 10시간 넘게 연습을 할 때가 많다. 19시간까지 연습한 적도 있다 한다. 한 시즌에 토슈즈 백 오십개를 사용한다. 발톱은 지금도 갈라지고 벌어지고 죽고 곪는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어딘가 아프다. 아픈 것도 무용수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다. 그녀는 그러나 연습만으로 예술은 만들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그녀는 배역의 혼을 끌어내는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 대본은 읽고 마음을 주고 또 준다. 영혼을 통해 음악을 듣는다.
주위에서 그 일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퇴계 이황도 말한다. "깨달음을 얻는데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즐거움이 따른다" 바둑이든 음악이든 무용이든 그 무엇이든 좋아서 빠져들면 깨우침이 있고 그것을 통해 인생을 알게 된다. 좋아하지 않고 알 수 없다. 알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면 달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뜻을 세워 스스로 무엇을 이루어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야한다. 마흔이 넘으면 평생을 걸 단 하나의 프로젝트를 만들어야한다.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늦게 시작한 사람이 현실과 꿈 사이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행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몰입하는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 괜찮다. 몰입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자기를 위해 좋은 일이다. 몰입은 행복에 기여한다. 사회는 행복한 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행복한 사람만이 행복을 전달할 수 있다.
네델란드의 한 정신 병동에 정신 분열증에 걸린 여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정신이 산만하고 감각도 무디기 한량없었다. 삶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녀가 꼭 한가지 조금 반응을 보인 것은 자신의 손톱을 다듬을 때였다고 한다. 병원의 의사들은 그녀가 전문적으로 손톱을 다듬는 강습을 듣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녀는 열심히 배우더니 그 후에는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의 손톱을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적 균형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퇴원하여 손톱을 다듬어 주는 전문점을 개업했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에게 손톱을 다듬는 일은 곧 생명으로의 귀환이었다.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인가 ? 세네카는 말한다. " 가치 있기 때문에 칭송 받는 것이 아니다. 칭송 받기 때문에 가치 있어 지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가 가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이다. 박세리는 어려울 때, 한국인들에게 좋은 위로를 주었다. 그러나 막대기 몇 개를 바꿔가며 딱딱한 작은 공을 쳐서 구멍에 잘 집어넣는 것이 손톱 다듬는 일 보다 인류에게 더 가치 있는 일인가 ? 누가 그러던가 ?
무엇이든 좋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좋다. 위대한 무용수 나진스키는 자신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대하여 말한다. "춤추는 사람은 없어지고 오직 춤만 남을 때가 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우리는 어느 때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우리는 '모험, 다양성, 새로움 그리고 로맨스'를 필요로 한다. 산다는 것은 자신에 관한 책을 한 권 쓰는 것과 같다. 지루함밖에 없는 이야기책은 스스로도 보지 않는다. 위대해 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60억 인구의 하나이면 족하다. 그러나 유일한 삶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또 우리는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지만 먹고 살 수 있을까?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가끔 밖에서 아내와 함께 술 한잔을 곁 드린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된다는 것은 늘 옳은 충고였지 않은가? 옳은 말이다. 어제까지는.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니다. 하나를 아주 잘 하지 않고는 먹고살기 어렵다. 미래는 전문가의 시대이다. 그리고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아 만족을 느끼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작파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 두 번째 방법이다. 그럴 수도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세 번 째 방법이다.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은 유태인이며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이다. 후에 로고테라피(Logoteraphy)라고 불리우는 심리치료법을 만들어 내었다. 한 개인으로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는 이미 벌어진 사실, 즉 '수용소의 한 죄수'라는 상황을 바꿀 수가 없었다. 절망이란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그러나 그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이 상황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고난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자신이 겪은 이러한 변화의 힘을 환자의 치료에 적용하였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부터 오는 상실감에 시달리는 한 노인을 치료하게 되었다. 그는 환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만일 선생님이 먼저 돌아 가셔서, 아내가 지금 혼자 남아 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 분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제 처가 혼자 남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절망을 겪게 할 수는 없읍니다."
"선생님의 고통은 그렇다면, 아내의 고통을 대신한 고통입니다."
그 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빅터 프랭클의 손을 꼭 잡은 후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처가 죽었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는 '희생'이라는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서 환자에서부터, 하나의 굳굳한 인간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빅터 프랭클은 고난만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난은 피할 수 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서 반드시 피해야한다. 일부러 고난을 찿아 가는 것은 마조키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난을 재해석함으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인생의 의미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날마다, 시간마다 인생의 의미는 달라진다고 믿었다. 마치 우리가 바둑을 둘때 객관적으로 '가장 훌륭한 수'란 없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느냐에 따라 가장 훌륭한 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 가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추상적 의미를 알아 내려고 애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삶은 구체적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으며, 되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이다. 지금 이 순간은 바로 도전이며, 당신이 풀어야할 문제이다. 꿈은 바로 아직 살아 있는 당신이 남은 미래를 위해 짜놓은 황홀한 각본이며, 진지한 깨달음으로 부터 시작한다.
꿈을 이루려면 '꾸는'것 만으로는 턱도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간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하루에 두 시간은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일에 써야한다. 2 시간 이상 투입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러나 그 이하로 줄이면 곤란하다. 시작해서 6개월 이내에 스스로 변화를 감지하고 확신을 가지려면 하루에 적어도 두 시간은 써야한다. 변화를 시작해서 6개월이 지나도록 변화로 인한 보람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지칠 수 있다. 인간은 증거를 필요로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약점이기도 하고 귀여운 점이기도 하다. 지치기 전에 변화의 혜택을 즐기려면 하루의 10% 정도는 자신에게 되돌려 주어야한다. 이 일이 그런데 쉽지 않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적으로 새로운 일에 몰입한다면 아주 많이 쓸 수 있는 것이 시간이지만, 일을 계속하는 경우에는 여가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대개 하루의 1/3은 자는 데 사용된다. 1/3은 직장에서 보낸다. 그리고 1/3은 우리가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직장인이 변화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8시간 정도를 개편해 보는 것이다. 8시간 중에서 2시간 정도를 빼낼 수 있으면 된다. 해 볼만한가?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 8시간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2시간 빼기가 만만치 않다. 우선 개인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이 속에는 기본적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사, 씻기, 화장, 출퇴근 혹은 운전등의 유지활동에 사용되는 시간이 보통 서너 시간은 된다. 순수한 여가 시간은 겨우 너 댓 시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 2시간을 빼낼 수 있겠는가?
좀 더 들여다보자. 여가 활동은 대개 TV,독서,취미,운동,영화,외식,술, 담소,교제,휴식,빈둥거리기등으로 이루어 진다. 매일 두 시간을 '빼낸다'는 것은 거의 초인적 노력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만일 우리가 TV, 술, 잡담같은 소극적 여가 활동을 2 시간 동안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가 활동, 즉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바로 그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전환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취미활동이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처럼 바람직한 것이 없다. 놀이가 곧 일이고 일이 곧 직업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매일 자신에게 돌려 준 2시간은 훌륭한 밑천이다. 수 없이 많은 갈림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마음속의 이정표를 따라 3년을 걷고 또 5년을 걸으면 그 길이 옳은 길임을 믿게 된다. 믿으면 그 일에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다. 삶은 곧 그 일이 되고 그 일을 통해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 일을 위해 살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 일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행복한 전문가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40이 넘어 시작해도 늦은 것은 아니다. 결코 늦지 않다.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인생이란 없다. 늦은 만큼 절실할 수 있으니까 괜찮다. 빈둥거리며 보낸 게으른 시간이 있고 후회가 있고 반전과 깨달음이 있는 삶은 재미있다.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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