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섬 거석상의 비극
1722년에 처음 이스터섬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떻게 이렇게 철저하고 고립된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에서, 현대적 기술도 없고 주변에 나무도 없는 환경에서,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90톤에 달하는 정교한 거석상들을 곳곳에 세울 수 있었을까?
이후 몇 세기 동안 백인들은 어떻게 ‘미개한’(?) 주민들이 사는 섬에서 그 신비한 거석상들을 세웠는지 설명하기 위해 각종 가설을 생각해 냈다. 가설은 주로 머나먼 대륙에서 누가바다를 건너왔다거나 외계인의 소행이라거나하는 것이었다.
물론 정답은 ‘폴리네시아인들이 만들어 세웠다’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현지 이름으로 ‘라파누이’라 하는 이 섬에 처음 상륙했을 무렵, 이미 태평양을 수천 킬로미터 항해하고 여러 섬에 정착하는 등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라파누이에는 고도의 문명이 피어났었고, 폴리네시아어로 ‘모아이’라고 불린 거석상은 폴리네시아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최고의 예술양식이었다. 모아이는 라파누이 사회에서 영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조상의 얼굴을 묘사한 상징물로서 조상을 기리는 역할도 했고, 석상의 건설을 명령한 이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모아이가 어떻게 세워졌느냐가 아니라 섬의 나무가 다 어디로 사라졌느냐가 수수께끼가 된다. 라파누이 주민들이 모아이를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운반해 세웠는지는 몰라도, 그 작업엔 커다란 통나무가 많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거석상을 세울 만큼 강성했던 문명이, 어쩌다가 근근이 먹고 사는 농부들과 허름한 카누들만 남아 네덜란드 탐험대를 맞은 것인가?
답은 이렇다. 라파누이인들은 운이 나빴던 데다가 바보짓을 벌여 자멸하고 만 것이다.
일단 운이 나빴던 것은 라파누이섬은 지리적, 생태적으로 삼림 파괴에 유달리 취약했다.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 지역의 다른 섬들에 비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데다가 좁고 평탄한 지형에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나무를 베면 자연적으로 보충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리고 바보짓을 했던 것이, 라파누이인들은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는 설비를 더 좋게 개선하려고 열을 올린 나머지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하고 나무가 다시 자라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나무가 한그루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벤 한 사람은 잘못이 없었을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상황은 회복 불능이 되어버렸다.
숲이 사라지자 라파누이 사회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나무가 없으니 고기잡이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고, 토양이 비바람에 깎여나가 황폐해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혔으며, 추운 겨울을 나려니 그나마 남은 초목마저 긁어모아 불을 피워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날로 희소해지는 자원을 놓고 집단 간에 경쟁이 거세졌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수순으로 이어진 듯하다. 절박한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거나 사기 충천이 필요하거나 자신이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할 때, 왕왕 그러는 습성이 있으니까. 즉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라파누이인들은 점점 더 큰 석상을 만드는 데 사활을 건 것으로 보인다. 섬에서 최후로 제작된 석상은 아예 채석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다른 석상들도 놓일 자리까지 가다 말고 길가에 나뒹굴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절대 우리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미개하지도 않았고 환경에 무지하지도 않았다.
『문명의 붕괴』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야자수를 벤 이스터섬 주민은 뭐라고 하면서 그 나무를 베었을까?” 정말 좋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아마 “인생 뭐 있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더 좋은 질문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나무나 마지막에서 세 번째, 네 번째 나무를 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베었느냐가 아닐까? 우리 인류사 전반을 예리하게 통찰해 볼 때, 그 정답은 ‘내 문제도 아닌데 뭐’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출처 : 『인간의 흑역사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톰 필립스 지음ㆍ홍한결 옮김(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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