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교정에서 자주 들었던 노래 중에서 ‘전대협 진군가’가 있습니다.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나조차도 그 노래가 귀에 익숙하고 즐겨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가사 중에서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사회 속에서 누가 투쟁가(혁명가)가 되는 가는 이 노래가 말하듯이, 짓밟히고 억눌리고 맞은 사람들이 투쟁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짓밟고 억누르고 쳐달라는 소리는, 그러한 투쟁가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투쟁가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틴루터 킹, 마하트마 간디, 체게바라, 돔 헬더 까마라, 에르네스또 까르디날... 이러한 혁명적 투쟁가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인권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입니다.
대학시절(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에 본 <로메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로메로 신부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남미의 신부입니다. 그가 암살당하는 장면에서 ‘나는 죽지만 여러분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라는 의미의 자막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두가 로메로 신부에 대해서 감동하고 있을 때, 나는 조금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습니다. 물론 영화가 로메로 신부의 삶의 전체를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가진 비판적인 시각은 로메로 신부의 삶과 신학적인 결단에 문제를 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영화 보기 전까지 로메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영화에 대한 느낌 중의 일부가 비판적이라는 말입니다.
<로메로>는 1977년 엘살바도르를 무대로 훔베르토 장군의 독재에 항거한 로메로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로메로 신부는 영화 속에서 평범한 신부의 위치에서 지역의 대표 주교가 되는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민중의 삶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저항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는 못마땅했습니다. 왜 자신의 삶의 자리가 변화하면서 평범한 모습에서 투쟁가의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한결같이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무수히 많은 투쟁가에 비해서 부족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성경의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로메로 신부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 속에 내재한 신의 본성과 현실과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신성을 가진 예수가 가진 최후의 가장 이기기 힘들었던 유혹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평범하게 살면 그렇게 싫은 십자가를 안져도 되고, 아들 딸 낳고 장수하면서 살 수 있지 않느냐는 사탄의 최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내뱉은 한마디가 바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서 위대한 투쟁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위대한 신부 로메로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뛰어난 투쟁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오히려 변절하기 쉽고, 그의 삶 자체가 조작된 것이거나 가식 혹은 거짓일 수 있다고 봅니다.
영화 속에서 로메로 신부는 아주 평범한 신부로 살아가다가 그 지역의 대표 주교가 되는 순간부터 부조리한 현실과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연상시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바로 이러한 불만 속에서 로메로 신부는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결국 로메로 신부는 억눌리고 짓밟히는 민중들과 함께 저항의 전선에 뛰어듭니다. 항상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저항합니다. 그는 민중들의 위에서 지시하고 군림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민중들과 함께 힘들어하고 고통을 받는 모습으로 살다가 결국 죽음을 당합니다.
비록 주변의 환경이 투쟁의 전선에 뛰어들도록 만들었지만, 로메로는 자신이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떠한 결단을 할 것인가를 결정한 순간부터는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신이 로메로에게 허락한 삶의 과정이었습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의 정치에 무관심했던 초기의 모습이 떠나지 않지만,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합리화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모습을 가졌는가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내가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고민할 것이며,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나의 모습이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싸워라...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누구의 입장을 대변해 주어야 하고, 누구의 입장에 대해서 함께 싸워주어야 합니까?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쩌면 우리는, 과거에 잘 나갔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과거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하면서 검증되지도 않은 나의 과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마치 영웅담을 이야기하듯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한때 잘 나갔지만 잘못된 선택(엄밀히 말하면 주변의 환경) 때문에 오늘의 초라한 나의 모습이 되었다고 스스로 격려(?)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에)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를 못 참던 내가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상과 타협하게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지는 않습니까? 자본의 논리에 굴복하는 선배와 동료들을 손가락질하던 내가 정작 자본 앞에서 ‘이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변호하지는 않습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이 훨씬 넘은 그때, 교회에서 성가대원들과 교사들과 함께 본 <로메로>라는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면서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의 세월 동안 나름대로 나의 머리와 생각, 사상은 진화되었기 때문에... 좀더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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