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에 이억기(전라우수영)가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월 28일경 원균이 왜선 10여척에게 쫓겨서 노량 근처로 피신해 있다는 전갈을 받고 출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당시 전라좌수영의 고문격인 70대 후반의 정걸(1514~1597) 장군에게 거북선 1척과 판옥선 몇 척을 주어 전라좌수영 근처 해역을 지키도록 하고, 23척의 판옥선(아마도 거북선 2척을 포함)을 거느리고 노량 근처의 원균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노량에서 원균의 판옥선 3척과 합류한다.
당시 2차 출전 명부는 다음과 같다.
“중위장에 순천부사 권준, 전부장에 방탑첨사 이순신,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 후부장에 홍양현감 배홍립, 좌부장에 신호, 우부장에 김득광, 좌척후장에 녹도만호 정운,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 자별도장에 우후 이몽구, 그리고 이순신의 군간들인 변존서, 나대용, 송희립, 이설, 신영해, 김효성, 배응록, 이봉수 등도 장수로서 출전했다.”
<귀선 돌격장으로 이기남과 이언량>
권준은 전라좌수영의 넘버2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녹도만호 정운은 이순신에게는 조자룡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나대용은 실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도 알려진 인물로 이순신의 군관으로 항상 이순신의 곁에 있었다고 한다. 송희립도 이순신의 측근이었으며 ‘좌정운 우희립’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귀선’은 ‘거북선’을 말한다.
사천해전의 진행과정
원균과 합류해서 사천에 가보니 왜선 13척 중에 한 척은 입구에 있어서 잡았고, 사천에 12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아마도 사천 지역에 왜성을 만들려고 할 때 공사현장을 방어하는 배였을 것이다. 당시 썰물 시간이라 작전을 전개하기 쉽지 않았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시도했으나 12척이 따라 나오지 았았고 몇 시간 동안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흐른 뒤에 밀물 시간이 되자 이순신은 2척의 거북선을 적의 함대를 향해 돌진하게 한다. 50미터 사정거리에서 왜군은 조총을 쏘기 시작했으나 뚜껑(철갑)은 조총을 튕겨냈고, 아래쪽은 (당시 15센치 두께의 나무였으므로) 총알이 박히기만 하고 효과가 없었다. 이때 거북선의 입에서 대포가 나와 쏘아대기 시작했고, 거북선의 노에 의해서 일본의 세키부네의 노가 깨지기 시작했다(세키부네의 노는 한 사람이 젓는 노이고 거북선의 노는 대여섯이 젓는 노였다). 거북선이 왜선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왜적은 멘붕에 빠졌고, 이순신이 판옥선을 거드리고 적을 향해 돌진한다(장사진). 그런데 너무 가깝게 접근해서 이순신 자신도 조총을 맞아 부상을 입게 되었다.
적의 작은 배들은 도망가고 한 대를 남겨놓고 모조리 격침시켰다. 모조리 격침시키면 왜적이 육지로 올라가서 백성을 괴롭힐 수 있었으며, 배를 남겨놓으면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치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공격하기 위해서 사천 해협 입구쪽에 정박하고 기다렸다. 하루 정도 지나니 일본 배들이 나오고 있었고, 이것을 기다렸다가 작살낸 해전이 바로 사천해전(1592.5.29)이다.
사천해전은 거북선의 위력을 확인한 전투였다. 이순신과 나대용이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지만 이순신은 상당히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부상은 기함(대장선)이 조총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천해전에 대해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왜인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울부짖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신은 여러 배에서 용감한 군사들을 뽑아서 쫓가가 목을 베게 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숲이 울창하고 또 해도 저물었으므로 도리어 해를 입게 될까바 두려워서 왜적을 찾아내여 목 베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일부러 작은 배 몇 척을 남겨 두어 적을 유인해내어 모조리 잡아 없앨 계획을 세워놓고는 밤을 타서 배를 돌려 사처너 땅 모자랑포로 나와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 『당포파왜병장』(1592.6.14)
사천에서 부상당한 이순신은 후에 유성룡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접전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기 때문에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또는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1593년)
1차 출정(5월 4일 ~ 5월 8일) 때 조선의 수군은 상당히 긴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탈영병이 생길 우려가 있어서 이순신은 배 위에서 잠을 자도록 명령하였다. (육지에서 잠을 자면 탈영병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 실제로 1차 출정 때 탈영병 포졸 황옥현을 참수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2차 출정 때는 사천에서 승리하고 사량도에 가서 사량도에 내려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 사량도는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도망갈 곳이 없었고, 1차 출정 이후에 이순신에 대한 신뢰도가 생겼기 때문에 병사들도 탈영할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사량도의 주민들이 조선 수군을 대접하였으며, 이순신은 6센치를 도려내고 총탄을 제거하였으며,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사량도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6월 2일에 사량도 건너편 당포에 왜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정한다. 지금은 쾌속선으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에는 노를 저어서 2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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