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등장하는 별표는 선조가 도망가면서 세운 임시 수도라고 할 수 있다. 부산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밀양을 지나 탄금대에서 신립을 격파한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와 (추풍령에서) 합류한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사실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1선발 고니시가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부하를 가토에게 제공해준다. 그런데 가토가 허를 찔러서 새벽에 먼저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고니시는 기병만 데리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는 이미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한 직후에 선조는 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두수 같은 관료들에게 이미 튈 준비를 하라고 해 놓고 모른척 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회의를 하게 된다. 이때 파천을 주장하는 이산해(1539~1609)와 목숨걸고 싸우기를 주장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는 선조... (어차피 신하들이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치는 것으로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한 선조의 선견지명)
외적이 침입해 왔을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을 무작정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고려의 역사에 현종(1009~1031)이 거란의 침략 때 나주까지 피난했었고, 무신집권기의 실세였던 최우(1166~1249)가 몽고의 침략 때 강화도로 피난(고려 고종, 재위 1213~1259)갔다. 고려말 공민왕(재위 1351~1374) 역시 홍건족의 침입 때 안동까지 피난간 사례가 있다. 한양에서 긁어모은 병력을 신립이 탄금대에서 고스란히 날려버린 상황이어서 한양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상황이라 피난을 가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능과 비겁함의 끝판왕 선조는? 피난을 가더라도 백성들을 챙기는 모습은 1도 없이 밤에 몰래 한양을 버리고 튀었다. 만약 당당한 왕이라면 아들(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분조하여) 훗날을 도모하도록 피난을 가게 하고, 자신이 당당하게 한양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이후 역사에 대대로 남았을텐데... (찌질한 군주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요~)
선조는 밤에 몰래 도망친다. 왕의 행렬이 100명도 안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을 세자로 어쩔 수 없이 세우게 된다. (이게 피난가는 선조가 했던 제일 현명한 결정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송강 정철이 ‘세자 건저 문제’(1591)로 귀양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 (정여립 사건으로 앙금이 남아있는 동인이 송강 정철을 ‘죽이자’, ‘살리자’ 하는 문제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구리에 있는 동구릉에 가장 넓은 벌판에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한 릉이 ‘선조릉’이다. 선조의 가계도를 보면, 의인왕후 박씨는 광해군을 아꼈고, 선조는 인빈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아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송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앉히자는 제안을 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간 것이다) 선조는 전쟁으로 피난을 가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세자를 광해군으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에 왜군은 한강을 쉽게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한강의 방어는 누가 맡았을까? 이때 한강의 방어를 맡은 사람은 김명원(1534~1602)과 신각(?~1592)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명원은 부하들에게 “말을 준비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미 도망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김명원)
한편, 신각은 양주에서 매복해 있다가 노략질하는 일본군 70명의 목을 베었다. 이것을 해유령 전투(1592.5.2)라고 한다. 신각은 자신의 승리를 장계로 보고한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김명원이 조정에 ‘신각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한양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지않고 도망쳤다’는 보고를 했고, 선조는 신각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이후 신각의 (승리에 대한) 장계가 도착하였고, 조정은 다시 서둘러 신각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보낸다. 그런데 미처 이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신각은 이전 명령에 따라 참수된다.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대문(흥인지문)을 통해서 한양에 입성한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는 남대문(숭례문)을 통해서 한양으로 들어온다. 이때 솔직히 고니시가 한양에 먼저 입성한 것 같은데, 가토가 ‘자기가 먼저 들어왔다’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장계를 보냈다. (이후 고니시는 믿을만한 사람을 히데요시에게 보내서 보고하도록 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토가 혼이 난다.
고니시의 부대는 동대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매복이 있을 것 같아서 들어오기를 주저했다는 조선측의 기록과 성문이 닫혀있었는데 병사들이 담을 넘어가서 성문을 열었다는 일본측 기록이 공존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불타버렸고, 전쟁 이후에 광해군이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을 재건하였으며, 경복궁은 대원군 때 재건하였다. 그렇다면 궁궐은 누가 불태웠을까?
당시 노비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 장례원이었고, 오늘날의 법무부에 해당하는 것이 형조였다고 한다. 이때 노비들과 죄인들이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궁궐들이 매우 아름다웠다는 기록이 있다.
왜군은 머무를 곳이 없어서 종묘에 주둔하였는데, 종묘는 조선 왕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은 밤에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두려워했으며, 실제로 귀신이 나왔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칼질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고니시가 종묘를 불태웠다. 이후에 왜군이 조명연합군에 밀려 한양을 내어주고 후퇴하면서 궁궐들을 불태웠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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