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징비록3 [임진왜란39] 한양 탈환, 쟤들 살려 보내야해?(feat.정걸의 용산 식량기지 박살과 고언백의 노원평 전투)│황현필 한국사 평양성을 빼앗기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후퇴하였고, 나머지 일본군도 한양으로 모여들어서 한양에는 5만이 넘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한양에 있을 수 없었다. 왜 그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을까? 1. 군수 물자 및 보급품 부족 : 이미 이순신에 의해서 남해의 제해권이 장악되고 한양에 남아 있는 일본군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 일본군의 막대한 병력 손실 : 여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일본군은 22만에서 1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10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3. 장기전에 지치고 병든 일본군 4. 명군의 참전 : 명나라 해안을 노략질하면서 경험한 무능한 명나라 군사들이 아니라 요동과 절강성의 정예부대를 경험한 후에 일본군은.. 2021. 4. 25. [임진왜란 34] 평양성 탈환전(이여송+류성룡+서산대사vs고니시) │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 중 평양에서의 4차례 전투가 있었다. 제1차 평양 전투 - 1592년 6월 15일(왕성탄 전투, 평양성 점령당함) 제2차 평양 전투 - 1592년 7월 17일(조승훈 패배) 제3차 평양 전투 - 1592년 8월 1일(조선군 패배) 제4차 평양 전투 - 1593년 1월 8일(이여송 승리, 평양성 탈환) 제1차 평양 전투(1592.6.15) 선조는 대동강까지 진격한 일본군을 보고 의주까지 도망가면서 윤두수(1533~1601), 김명원(1534~1602), 이원익(1547~1634)에게 방어하라고 시켰다.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쪽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벽도 잘 수축되어 있었다. 수비를 하던 조선군이 의외로 선제공격을 하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이.. 2021. 4. 24. [임진왜란33] 역전되는 전세, 요동 기병의 고니시 공격 │황현필 한국사 [8분 정도까지 복습모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다(5월 3일에 한양을 빼앗김). 원래 일본군은 한양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가 도망가면서 전쟁이 꼬이게 되었다. 한양까지만 대비하고 건너온 일본군은 한양 이북의 지도나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40일이 걸렸다(6월 15일). 명나라 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약간의 식민사관에 묻혀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대 감소와 사기 저하 보급로 끊김 의병에 대한 두려움 명군 참전에 대한 두려움 추위에 대한 공포 한편 요.. 2021. 4. 24.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