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李昇薰, 1864-1930)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南岡). 평안북도 정주 출신. 아버지는 여주이씨 이석주(李碩柱)이며,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역사학자 이기백과 친척이다. 이기백의 고조부인 이승익이 이승훈의 형이다.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여주이씨 이석주와 홍주김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별세하였다.
1869년
고향인 정주를 떠나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873년
할머니와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1874년
학업을 중단하고 그 곳의 이름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상점(林權逸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가 3년 뒤에는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1878년
근면성과 성실성이 인근에까지 알려져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전주이씨 이경선(李敬善)과 결혼하게 되고, 이때부터 점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밟았다.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해, 첫째 노동환경을 일신했고, 둘째 근로조건개선에 힘썼으며, 셋째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근로자들의 작업의욕을 북돋아 생산능률이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
1895년
오희순의 후원으로 유기점 재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해 한반도가 전장화되자 납청정의 이승훈의 상점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잿더미가 되었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란갔다 돌아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1899년
수릉참봉직 제수, 용동으로 이사하고 서당 설립
1901년
운수업ㆍ무역업에 진출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ㆍ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1902년
염전운송선 침몰로 피해
1904년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러일전쟁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1905년
용동에 칩거
1907년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들은 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금연ㆍ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서당을 개편해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이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이승훈의 열성과 성의을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ㆍ이광수(李光洙)ㆍ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중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908년
기독교에 입교, 평양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
정주역에서 순종을 알현하였고, 평양에 자기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오산교회를 설립하였다.
1911년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중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용산을 출발하던 경의선 열차에 탑승할 때 변장을 하고 여행하였으나, 동료 김구, 양기탁, 윤치호, 옥관빈, 이동휘 등 동료 신민회 회원들이 일본 경찰에 줄줄이 체포되어 강제로 하차당하는 것을 보고, 신문을 보던 그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뒤 창밖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창밖을 보며 눈물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총독부의 일본 경찰은 변복하고 신문을 읽던 장년 남성이 이승훈임을 알아보고 바로 체포했다. 105인 사건이 적발될 당시 그는 이미 이전의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서울에서 검거되자 법원으로 압송,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해 가을에 105인 사건이 일어나 유동열(柳東說)ㆍ윤치호(尹致昊)ㆍ양기탁(梁起鐸)ㆍ안태국(安泰國)ㆍ임치정(林蚩正)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이승훈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1912년
재판에서 10년형 언도받고 복역
1915년
가출옥. 정주교회 정기정 목사에게 수세
1916년
오산교회 장로로 장립
191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입학
1919년
2월 : 상해에서 입국한 여운형과 접촉하여 독립선언 계획, 상경하여 천도교측과 접촉, 천도교측에 기독교측의 동참의사 전달, 독립선언을 위한 기독교측의 최종회의를 주도, 3월 1일 민족대표들과 독립선언 후 일경에 피체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래서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민족교육의 온상인 오산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면하지 못했으나,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1922년
부인 이경선 별세하였다. 경성감옥에서 출옥하였고,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었다.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였다.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 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 취임, 조선기근구제회 집행위원장 피선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1925년
오산학교 재단법인 이사장 취임
1926년
오산학교가 오산보통학교로 승격, 길선주 목사의 주례로 장선경과 재혼
1928년
남강선생동상건립준비위원회 발족
1929년
기독신우회 입회,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동상 건립
1930년
평북노회에서 남강의 장로직 면직 처분, 동상제막식 거행,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사망
1930년 사망하면서 경성제국대학에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한 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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