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1] 이순신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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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11] 이순신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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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어떤 인물인가?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준 인물... 혹시 외계인은 아닌가? 아니면 먼 미래에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타임머쉰을 타고온 인물은 아닐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의 영상은 이순신 장군의 프롤로그로 작성하였다.

 

1. 23전 23승 무패의 전설을 만든 인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은 어느 정도였는가? 그 당시 조선의 조정은 조선의 육군이 강하고 수군이 약하니 육지로 끌어들여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우리 역사상 동북아 바다를 장악한 인물은 9세기 통일신라의 장보고’(787~846)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들어선 이후 14~16세기의 동북아 바다는 왜구(倭寇)가 판을 치고 있었다. 당시 동북아 최강의 수군은 일본군이었다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수군의 주력... 판옥선... 튼튼하지만 느리다
일본 수군의 주력선... 빠르지만 내구성이 약하다

 

임진왜란 초창기에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과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은 처음부터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으며, 훗날 이순신이 모함을 받은 이후에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 원균은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깨끗하게 말아먹었다. 객관적인 전력을 떠나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보유했던 1,300척의 배 중에서 800여척을 침몰시킨 것이다.

 

2. 『난중일기』를 남겼다.

 

난중일기는 세계기록유산이다. 개인 작품 중에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정조의 일성록, 허준의 동의보감, 이순신의 난중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3대 기록으로는 선조수정실록, 징비록, 난중일기이다. 그 밖에 정탁의 피난행록, 조경남의 난중잡록등이 있지만 임진왜란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난중일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15921월부터 195811월까지, 노량해전 이틀 전까지 쓰셨다.

 

 

3. 거북선을 해전에 활용하였다.

 

문화재청장이라면 한강에 거북선 100대 띄워서 우리 민족을 제대로 홍보할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말(1882년 임오군란 시기)에 외국인들이 거북선을 연구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거북선이 시험 운행된 날은 1592412일로 임진왜란 발발 하루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미리 일어날 것을 알고 철저하게 대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거북선은 적의 전투 기술(조총과 사다리로 배에 올라타서 백병전을 펼침)을 미리 꿰뚫어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든 돌격용 무기였다. 조선 초기 태종 때 만든 것을 실용적으로 업그레이드 했다고도 하며, 나대용(1556~1612)과 함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4. 구국의 영웅

 

조선을 전란에서 구한 인물이지만, 하필이면 무능의 끝판왕인 선조와 시기심의 끝판왕인 원균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외적과만 싸운 것이 아니라 무능한 왕과 시기질투하는 신하들과 싸웠다고 할 수 있다.

 

5. 전쟁 중에 감옥에 갇히고 고문까지 받았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고문까지 받았으며 사형 직전까지 내몰렸던 이순신은 이원익(1547~1634), 김명원(1534~1602), 이덕형(1561~1613)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형은 면하게 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이때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이 처참하게 패하고 자신이 인정했던 전우인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리고 백의종군 당시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되어 3년상을 치루지도 못하고 전장으로 나가는 이순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당시 이순신은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천지간에 나 같은 자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빨리 죽으니만 못하도다.”

 

그리고 전쟁 중에 셋째 아들 이면(1577~1597)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이때도 안타까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6. 12척의 배만 남았다.

 

칠천량에서 간신히 12척의 배만 남았을 때 이순신은 선조가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거부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신의 몸이 살아있는 한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12척의 배로 왜군 133척을 박살내버린다.

 

전쟁에 임했을 때의 신중함과 기어이 승리해야 하는 절박함, 고문의 후유증을 딛고 전장에 임하는 이순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는 전투에 임하는 부하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 무릇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7. 노량해전에서 전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 이순신!’하며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대한 꿈을 망친 인물이 이순신이다. 토요토미가 죽은 이후에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이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당시 명나라 해군제독인 진린에게 뇌물까지 쓰게 된다. (이순신이 돌아가는 길목을 막을까봐)

 

전투에 소극적인 진린을 찾아가서 설득하여 진린과 함께 참전한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에게, 한 놈의 왜놈이라도 더 죽여라!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며 노량에서 후퇴하는 왜적을 공격하다가 총탄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이때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순신이 정말로 노량에서 전사했는가는 궁금하면 계속 동영상을 지켜봐라)

 

역사교과서에 이름 한 줄이라도 적히는 인물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심지어 나쁜 일을 해서 기록에 남은 인물은 나쁜 놈이지 못난 놈은 아니다!’ 이순신은 공부하면 할수록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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