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제 축구 경기가 열렸다. 시합이 열린 곳은 서부 스코틀랜드의 크리켓 그라운드였는데, 이 시합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0대 0으로 비겼다.
[187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두 번째 국제경기(이때도 장소는 크리켓 경기장)를 했으며, 잉글랜드가 4-2로 이겼다. 이때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시합을 하기로 했다.
[1876년]
웨일즈와 스코틀랜드가 첫 경기를 했는데, 스코틀랜드가 4-0으로 승리하였다.
[1880년]
아일랜드가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했으며 상대팀은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가 13-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1884년]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4개국이 ‘홈 인터네셔널 챔피언전’을 열었다. 서로 리그전을 펼쳤는데 최초의 챔피언은 스코틀랜드에게 돌아갔다.
[1888년]
스코틀랜드 축구 클럽 대항전의 승자인 랜튼 팀과 잉글랜드 축구 클럽 대항전의 승자인 웨스트브롬위치 엘비언 팀이 경기를 가졌다.
[1895년]
영국 축구 천재 스티브 블루머(Steve Bloomer) 선수가, 그의 데뷔전이기도 했던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두 번이나 골을 넣었다. 경기는 9-0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하였다.
[축구 천재, 스티브 블루머]
1874년에 태어난 그는 국제 축구 초창기,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블루머의 외모는 축구 선수 특유의 터프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안색이 유난히 하얗고 창백해서 팀 동료들이 ‘희멀건’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1896년 웨일즈와의 경기에서 블루머는 5골을 넣었다. 이를 보고 한 신문기자는, 그가 ‘뱀장어가 미끄러지듯 날렵하게’ 그라운드를 누볐다고 표현했다. 그는 1892년부터 1914년까지 더비 카운티 팀과 미들스브로 팀 선수로 뛰는 동안 598번의 경기에서 353골을 넣었다.
스티브 블루머는 40살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축구 인생을 계속하기 위해 독일 팀의 축구 코치로 갔다.
1997년, 더비 센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동상을 만들기 위한 기금의 일부는 각국 선수들이 우승컵을 팔아서 마련하였다고 한다.
[빌리 메레디스]
스티브 블루머와 같은 해에 태어난 빌리 메레디스(Billy Meredith)는 당시 영국 축구계에서 블루머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1905년에 1년 동안 출전이 금지되는 시련을 겪었는데, 자신이 속해있던 맨체스터 팀의 우승을 위해 애스턴 빌라의 주장에게 10파운드를 건네면서 져달라고 꼬셨기 때문이다.
스티브 블루머와는 달리 메레디스는 누가 보더라도 축구 선수로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사냥개처럼 늘씬한 몸매에 달리기 실력도 상당했던 것이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모습에 관중들은 항상 환호를 보냈으며, 그는 ‘그라운드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25년 동안 웨일즈 팀에게 48번의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1920년 45세 8개월이라는 나이로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하이버리의 아스날 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그가 속한 웨일즈는 잉글랜드를 2-1로 이겼는데, 웨일즈가 잉글랜드를 이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마지막 국제 시합 이후, 메레디스는 국내에서 4년간 더 뛰었다. 1924년, 50세 생일을 4개월 앞둔 어느 날, 메레디스가 속해있던 맨체스터 팀은 FA컵 준결승에 오르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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