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반응
본문 바로가기
[책 이야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반응

by [수호천사] 2023. 1. 4.
반응형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반응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은 190910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직을 사퇴하고 장래의 대륙에 대한 야망을 겸하여 만주시찰에 오르려 하던 중 하얼빈역에서 한 청년(안중근)의 탄환에 맞아 즉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한국인들에 대한 자유로운 논평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국외 한국계 신문들은 국내 여론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안중근의 행위를 의거라 하여 예찬하였다. 일본 국내의 일반 여론은 말할 것도 없이 애도 일색이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복음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우리나라 국민은 오늘날 국가 공신이었던 이토 공작을 오이(大井)촌에 묻으려 한다. 메이지유신혁명 당시부터 4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거쳐 온 그의 정치적 생애는 이제 끝났다. 지금까지 근면으로 군주와 국가를 위해 힘써왔고 새로운 문명의 흐름을 잘 흡수하여 개국의 국시를 지도하였던 헌법을 제정할 때는 국민의 자유를 확고하게 해주었고 그 자신도 많은 독서를 통해 신지식을 얻는 데 힘써 진보의 세력이 되는 등, 비록 비할 데 없는 훈작(勳爵)으로 이를 보답하지만 그 공로는 국민의 감사로 빛나야 한다. ……”고 서술함으로, 이토의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에 남긴 공적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사(公私)의 생활에도 만인의 모범이 될 만한 점에 있어서 이토 공작으로서 저 위대한 평민(링컨)에 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대임(大任)을 짊어지고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암살당한 그 사실 또한 링컨과 비슷하지 않는가? 그리고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에 암살되었으며 이토 공작 또한 조선통감의 도장을 찍자마자 한국인에게 살해되었다”며 한일합병이라는 대임 도중에 ‘흉한의 독수에 피살’당했다는 것을 링컨이 비명횡사당한 사실에 비유하였다. 한편 “죽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허물을 잊게 해 준다. 하물며 비명의 죽음으로 묻히게 된 사람에게서 특히 이토공의 죽음에는 희생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취했던 조치가 실로 부득이한 것이라는 점은 열국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토 공의 이와 같은 사건을 슬퍼해야 할 일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합병으로 같아진 한국인?) 이루어진 역사도 또한 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공(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의 죽음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강자의 논리로 이토의 공적을 칭송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한국의 청년에 의해 왜 이같은 일이 일어났는가? 안중근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단지 흉악범 안응칠(본명 안중근)은 천주교도라는 소문만 나돌았다. 일본의 천주교회가 한국의 천주교에 조회해본 바에 의하면 관계가 없다고 한다고 하여 안중근이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였다. 한일의 국민감정이 서로 달랐던 것인지 위에서 말한 기독교회의 논평에 나타난 일본측 시점의 일변도는 31운동 당시에는 약간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시종일관 변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몰락한 무사 출신인 초기의 일본기독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결코 제거하기 어려운 굳건한 애국심에서 나온 발상이었을 것이다.

 

[남북한기독교사론] 사와 마사히꼬 지음, 44-46쪽

 


적어도 당시 일본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의 링컨에 버금가는 민족의 영웅이었다고 볼 수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


TOP

TEL. 02.1234.5678 /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