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ㆍ민주반역자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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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독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ㆍ민주반역자인 증거

by [수호천사]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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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ㆍ민주반역자인 증거

이승만 독재와 실정이 절정으로 치닫던 자유당 말기, 심산 김창숙은 독부(獨夫) 이승만이라 했다. ‘독부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남자를 말한다. 과연 이승만은 독부였다. 자유당 말기뿐 아니라 미국 망명 기간, 귀국하여 단독정부를 세우고 12년 전제권력을 유지할 때가 다르지 않았다. 독재ㆍ독부ㆍ독선ㆍ독점 등 그에게는 홀로 ()’자가 유독 많이 따랐다. 물론 에는 독립운동도 포함된다.

 

독재자 이승만 평전을 집필하면서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분장된 그의 망명기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추종자들이 건국 대통령으로 포장하는 해방공간의 행적이 얼마나 사대적ㆍ반민족적이었는지, 집권기간의 전제정치가 얼마나 반민주적이었는지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여기에 그 증거들을 요약 정리하여, 분칠된 영웅의 가면을 벗긴 그 진짜 모습을 전하고자 한다.

 

1. 1904 8 9,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도움으로 5 7개월만에 조기 출감했다. 출감 후 잠시 상동교회 부설 청년상동학원 교장을 지내다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이때 총독부에 그의 출국을 주선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헤리스는 유명한 친일파였다.

 

2. 한미수호조약 이행을 촉구하는 외교에 실패하고 그길로 미국에 눌러앉아, 미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과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이 되었다. 하버드대 재학 중이던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 교민사회의 분노를 샀다. 이후에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등의 의열투쟁을 테러로 비난했다.

 

3.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지 한 달여 만인) 1910 10 5년 만에 귀국, 1912년 초까지 YMCA 학생부ㆍ종교부의 간사로 근무했다. 한국 체류 5년 동안 민족문제, 독립운동은 외면한 채 오히려 반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유학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발언하는 등 반일운동보다 해외유학을 권장했다.

 

4. 총독부가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 지도자 등 900여 명을 구속하고 이 중 105명을 기소한 ‘105인 사건 와중에 미국인 친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이 무렵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병탄 이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과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일제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박용만의 주선으로 1913 2,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5. 당시 하와이에는 8000여 교민이 살고 있었다. 교민들은 이승만이 ‘105인 사건을 피해 도망왔다고 불만이었다. 태평양잡지를 발행한 이승만은 독립지사들의 무력항쟁과 의열투쟁을 비판하며 교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주도권 싸움을 벌여 교민사회를 분열시키고, 무장투쟁론에 반대하여 박용만을 축출했다. 그는 미주 한인사회에서 트러블 메이커였다.

 

6. 1919년 초 제1차 대전 전승국들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좌절, 대한 은사였던 윌슨 대통령과의 면담도 좌절, 강화회의에는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김규식이 참석했다. 정한경과 1919 2 25 연합국 열강이 현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두는 조처를 해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 측근 정한경은 국내의 31운동 뒤에도 뉴욕타임스에 쓴 <한국의 호소>에서 일본 대신 미국의 통치를 요청했다.

 

7. 1919 31운동 이후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는 실체가 거의 없는 지상정부에 불과한데 언론보도에 과대 포장되었다. 한성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된 그는 집정관총재직을 대통령으로 바꿔 행세했다. 또 그해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된 그는 미국에서 내내 대통령으로 행세했다.

 

8. 1920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정부수반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임정의 내분만 격화시킨 끝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현실성 없는 외교독립론만 주장했다. 1922 2월 하와이로 귀환하여 이듬해 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 남녀학생 20명으로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 끝에 일본 여권으로 한국을 방문하도록 했다. 명색이 임시정부 대통령 신분으로 한 일이다. 이때 하와이의 한 강연에서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모범적이라고 찬양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숱한 친일적 발언 가운데는 대일전을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 1922 9월의 망언도 있다.

 

9. 1922 6 17,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의 독선적 행위와 독립자금의 사적 유용 등 5개항의 사유를 들어 그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했다. 또 임정은 1925 4 10일 이승만이 위원장으로 있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했다.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여 윤치영 등을 시켜 명맥을 유지하면서 임정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와이 체류 중에 한인사회단체를 자기중심체제로 바꿔 교민사회를 분열시키고, 대한인동지회를 개편하여 자신을 종신총재로 추대했다.

 

10. 1923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난하면서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에 따르면 이승만은 비밀사절을 상하이 임정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토록 설득했다. 이봉창ㆍ윤봉길 의거가 한국독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11. 1944년 한인연합회 하와이 지부 등 한인사회는 교민사회를 불화와 분열에 빠뜨린다는 사유를 들어 충칭임정에 이승만의 소환을 요청했다. 미 정부의 한국임정 승인 거부에는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그 무렵 이승만은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치하려다 교포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12. 1945 7월말 태평양전쟁을 이끌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문으로 강력한 반소ㆍ반공 입장을 전달, 맥아더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의 항복 직후 맥아더 면담에 성공한 이승만은 맥아더의 주선으로 9 16일 미 군용기를 타고 미군 장교 복장으로 귀국했다.

그에 앞서 이승만은 1941~42년 사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OWL가 방송한 미국의 소리와 미 정보조정국의 요청으로 행한 한국어 단파방송을 통해 미국이 지원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3. 해방공간 미군정하에서 남북협상파와 내내 대립각을 세운 채 민족을 외면하고 자신의 권력욕만 채우고자 1946 6 정읍 발언을 시발로 분단정부 수립에만 매달렸다. 1948 510총선에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입후보를 봉쇄하고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이어 그는 625전쟁 통에 최능진에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씌워 총살형에 처했다.

 

14. 제헌헌법의 내각책임제 시안을 억지를 부려 대통령중심제로 바꾸게 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권력의 유지ㆍ강화에만 몰두하여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그는 친일분자들을 중용하는 한편 (주로 독립지사 출신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정치보복을 자행함으로써 김구 암살, 국회프락치사건 조작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5. 제주 43사건 발발하자 관련 법률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처벌을 지시하여, 3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적 제거와 언론 탄압에 활용했다.

 

16. 이승만 정권은 국방안보에는 소홀한 채 북진통일의 허세만 일삼다가 625남침을 초래, 서울시민을 속인 채 맨 먼저 후방으로 줄행랑을 놓는 등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한편으로 죄 없는 양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학살했다. 그런가 하면 피난 수도 부산에서까지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반민주 만행을 일삼았다.

 

17. 1950 7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을 보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하면서 시효도 명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휴전협정 당시 정치적 책임추궁 회피용으로 맹목적인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정에서 제외되어 주권을 포기한 결과를 초래했다.

 

18. 1954 7 28,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게재던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을 행하면서 한국군 20개 사단 제공 의사를 밝혔다. 이에 워싱턴포스트는 불행한 연설이라고 비판했으며, 그 자신 역시 나중에 일생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고백했다.

 

19. 625전쟁 이후 미국의 소비재 원조에만 의지한 채 중장기 경제정책의 부재로 대미종속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반공ㆍ독재체제를 강화하고 평화통일론을 탄압했다. 그의 북진통일론은 통일의 외피를 쓴 반통일론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이 무렵 그의 비판 언론 탄압은 극에 이르러 결국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했다.

 

20. 이승만 정권의 만행이 말기적 증상으로 치닫는 가운데 행해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이라 무고하고 419의거를 난동이라 비하했다. 그런 가운데 학생ㆍ시민에게 발포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부 이승만 평전] 399-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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