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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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by [수호천사]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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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칠천량 해전(1597.7.15)의 주인공 원균... 이순신의 한산도의 승리보다 더 큰 패배를 안겨준 장수... 그는 과연 칠천량에서 죽었을까?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우고 자신을 이순신과 등치시키려는 것은 솔직히 코메디라고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려운 가운데 권력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을 연개소문과 등치시키려 했다. 어찌보면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니 박정희는 차라리 연개소문을 존경한다고 했어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후 연개소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당나라와 대결한 인물이다.) 한때 진보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순신 띄우기에 불만을 가지고, 이순신에 대한 반대급부로 원균을 연구해 보았으나 원균은 정말 답이 없는 인물이고 진짜 무능력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최근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언급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 극우 유투버들이 원균을 높이고 이순신을 낮추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21세기 극우는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높이는 건 개나 줘버리고 자학사관(자국의 역사를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 비하적으로 평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수... 비교불가의 장수... 역대급 장수... 그가 바로 원균이다. 그리고 그 원균이 칠천량에서 전사한 것이 통념으로 굳어져 왔다. 그런데 과연 원균이 칠천량에서 전사한 것일까?

 

[원균의 대장선에 타고 있었던 김식의 보고 내용]
『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지역 춘원포로 후퇴했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해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58) 걷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보니 왜군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원균의 생사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보고를 통해서 원균이 전사했다고 알려졌는데, 후에 김식의 보고가 상당수 거짓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식이 파직당했다고 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전투에서 조선의 장수를 죽이면 항상 기록에 남겨두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들어가는 칠천량 해전에서 만약 원균을 죽였다면 원균의 시신이나 목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해서 진주성주 서예원의 목을 (김시민의 목으로 착각하고) 일본이 가져가기도 했었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 이후 살아 있었음을 의심케 하는 기록들>

 

유성룡의 『징비록』
원균은 도망쳐 바닷가에 이른 뒤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달아나려 했으나 몸이 살찌고 거동이 둔하여 소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측근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어떤 이는 원균이 이곳에서 적에게 살해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달아났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선조실록 1597년 7월 26일』 권율의 장계
신의 군관인 최영길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에 도착한 대선 18척과 전라선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 남녀, 군기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권율은 칠천량에 참전했다가 살아돌아온 최영길의 보고를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이때 권율은 원균이 살아서 진주로 도망쳤다고 보고하고 있다.

 

『선조실록 1597년 8월 5일』
이원익이 치계하기를 많은 장수들에게 모든 군법을 시행할 수 없다 해도 원균은 주장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률로 처단해야 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대로 윤허한다. 다만 원균을 죽이려 할 경우 균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을 듯하니, 헤아려서 처리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원균이 군사를 잃은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그간에 잘못한 죄를 오로지 원균에게만 책임지울 수는 없을 듯하니, 우선 원균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대로 윤허하였다.

 

선조실록 159785일의 기록은 원균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원익과 선조가 대화하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내용은 1년 뒤인 1598년의 선조실록에도 나타난다.

 

『선조실록 1598년』
비변사에서 치계하기를 원균이 주장으로써 절제를 제대로 하지못하여 전군이 함몰되게 하였으나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사관이 이르기를 칠천량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을 받아야 한다. (중략) 당초 이순신을 모함하고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쳐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시사를 목도하건데,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이후 1601년에 원균이 죽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원균은 칠천량에서 살아남았고 은둔해 있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1년에 죽었다고 생각해 볼수도 있다. 선조는 끝까지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자신도 도망자였기 때문에 도망자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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