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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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by [수호천사]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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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최근 원균의 후손들과 원균의 고향 평택시에서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작업이 있다. 원균이 재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인가? 원균은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판옥선 74척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1만여명의 병력을 해산하고 튄 인물로, 일본군이 경상도에 쉽게 상륙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무능력함도 보여주었고,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을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원균을 재평가해서 띄우려는 어처구니 없는 평택시에 대한 기사

 

한국사를 가르치는 선배 중에 1881년에 청나라 무기를 배우기 위해 청나라로 건너갔던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의 고손자인 분이 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임오군란은 구식군대가 별기군(신식군대)과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이었고 대원군이 재집권하면서 영선사 일행이 조기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민비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서 흥선대원군을 잡아가게 만들었는데, 이때 청나라 군대를 끌고 들어왔던 인물이 영선사 김윤식이다. 김윤식이 위안스카이와 함께 청나라의 3천 병력을 끌고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이후 용산에 3천 병력을 주둔시키며 내정간섭을 하게 된다. 서울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 임오군란이고, 단초를 제공한 권력자가 민비였으며, 청나라 군대를 끌고 들어온 사람이 김윤식이다. 그래서 그 선배는 술만 마시면 미안하게도 내가 김윤식의 고손자다. 내가 대신 사죄한다고 말한다. 이게 올바른 후손의 자세 아닌가?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윤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해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가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해 계책을 결정한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원균은 그 집에 첩을 데려다가 함께 살면서 이중 울타리를 쳐 놓아 장수들조차 그를보기 힘들었다. 또한 술을 좋아해서 술주정이 다반사였다. 군중에서는 형벌이 무시로 이루어져 병사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왜놈들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네 그려.”
장수들 또한 그를 비웃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아 지휘관으로서의 품위나 명령이 지켜지질 않았다.
징비록

 

 

물론 유성룡이 남인이어서 남인의 입장을 많이 반영한 책이고, 당시 서인이었던 원균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균의 가문인 안중홍과의 대화 내용을 기록한 안방의 은봉전서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안방의 은봉전서>
원균 : 제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안중홍 : 적을 무찔러서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야 진짜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지, 겨우 이순신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소?
원균 : 멀리서 싸울 땐 편전을 쓰고, 가까이서 싸울 땐 칼과 몽둥이를 쓰면됩니다.

 

 

오히려 편전은 적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사용하는 무기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수군은 일단 멀리서 함포사격으로 적을 공격하고 되도록 백병전은 전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마치 병법이라고 떠들어대는 무식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 치룬 해전은 다음과 같다.

 

1597년 3월 9일 기문포해전, 고성 현령 조응도와 140여 명 전사

1597년 6월 18일 안골포 해전, 보성군수 안흥국 전사

1597년 7월 7일 부산포 공격, 판옥선 20척 상실(9일)

 

기문포해전(1597.3.9)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당시에 선조와 김응서는 나름 고니시와 요시라와의 정보라인이 형성되어 있었고, 선조는 의외로 고니시는 좋게 보고 고니시의 정보를 통해서 가토를 잡고 싶어했다. 고니시는 요시라를 통해서 고니시의 부장들이 벌목하는 것을 김응서에게 허락을 받아낸 상태였었다. 이때 원균이 판옥선을 몰고 가서 안심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때 화가난 일본군이 당시 정박해 있던 조응도의 판옥선에 올라타서 조응도와 140여명의 수군을 전멸시키고 판옥선도 빼앗아 버렸다. 빼앗긴 판옥선을 조선의 판옥선이 공격해서 격침시키는 코메디같은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때 어쨌든 원균은 일본군 47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장계를 올렸다. (그런데 판옥선이 빼앗기고 조선 수건 140명의 전사는 빼고 보고한 것 같다) 이러한 장계에 대해서 선조는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원균의 기문포해전의 승리?> 선조실록 1597325
통제사 원균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하고 수급 47급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원균과 공이 있는 사람을 즉시 논상하고 혹 관원을 보내 호군하여 장사들을 격려할 일을 의계하라. 그리고 적의 수급과 계본을 가지고 온 사람도 아울러 참작하여 논상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라.”

 

그런데 이후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온다. 원균이 양아치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율도 장계를 올려서 권율의 양아치 같은 행동을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군인 고니시와 요시라가 조선 조정에 항의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수군 혼자는 힘들다는 원균> 선조실록 1597329
우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쇄한 자를 제하고 정병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돌시켜 한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에 비가 개지 않아 초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 다 불편할 것이니 이때는 육전도 되지 않을 듯 합니다. 하물며 가을이 다 지나고 난 뒤에는 바람이 점점 세지고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질 것이니 배를 부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때는 수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또한 행장, 요시라 등은 거짓으로 통화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이것은 불과 두 달 전에 자신이라면 부산을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원균 자신이라면 부산을 공격하겠다라는 상소> 선조실록 1597122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펼치고, 1백 여 명이나 2백명 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데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이때부터 조정에서도 원균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군의 최고사령관인 권율도 원균에 대해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619, 새벽닭이 세 번 울 때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권율)와 황종사관이 나와 앉아 잇었다.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안골포와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질질 끌면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위에서 내려온 밀지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경솔히 들어가 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난중일기』

 

원균이 출전을 꺼려하고 병력이 적다고 징징거렸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육군의 휘하 5천을 빼서 원균에게 보충해주기도 했고, 기문포 해전 이후 장계를 군의 총 책임자인 자신을 건너 뛰고 곧장 선조에게 올렸다는 것도 괘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능한 지휘관, 곤장을 맞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난중잡록』

 

결국 권율은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까지 치게 된다. 이것은 합참의장이 해군참모총장을 불러다가 곤장을 때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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