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집 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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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잡동사니]/[상식&지식]

이완용 집 고목

by [수호천사]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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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집 고목

 

나라를 판 이완용(李完用)의 생질에 일제 때 은행가요 재벌인 한상룡(韓相龍)이라는 이가 있었다. 어느 여름날 지금 인사동(仁寺同) 이문(里門) 안에 있는 이완용의 집에 들러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와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더니 집 뜰에 있는 고목에 벼락이 쳐 두 갈래가 났다. 이항구가 기겁을 하고 안방에 들어가 이불을 둘러쓰고 있자 부동(不動)하고 있던 이완용이 `벼락친 다음에 도망쳐야 쓸 데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한다. 그때 외숙 얼굴에서 전에 못 보던 서글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질은 회고하고 있다. 이문 안 고목은 제 몸을 다쳐가며 민족의 원한과 분노를 결집, 뇌성벽력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자에게 웅변을 한 것이다.

 

이문 안 고목은 인조(仁祖)가 등극(登極)하기 이전, 그 집에서 살았을 때부터 고목이었던 것 같다. 광해군(光海君)의 악정을 종식시킨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던 날 장안 백성들이 이 이문 안 고목 아래 몰려들어 환호를 했고, 그 후 영조(英祖)는 그 나무에 등극목(登極木)이라는 명예까지 내렸던 심지(心志)와 뼈대가 있는 나무다.

천심(天心)마저는 거역할 수 없었던지 이완용은 그 집을 팔고 이사를 했고 요정인 명월관 지점(明月館 支店)이 들어섰다. 바로 그 명월관 2층 방에서 남북으로 난 창문을 열고 33 인의 민족 대표가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3.1운동을 기폭시키고 있다. 63 년 전 바로 오늘에 있었던 일이다. 물론 상처난 그 고목은 남쪽으로 난 창문 너머로 그 민족 의지의 구심점(求心點)을 신나게 지켜 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 나무가 베어지고 없고 그 집은 커녕 그 터마저도 여긴가 저긴가 경계도 흐려진 채 고층 건물이 덜렁 들어서 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소나무 한 그루 베어지고 없어도 서글픈데, 이 민족의 나무임에랴 산산이 도끼질 당하여 지금쯤 어느 누구의 집 뒷간의 깔판이 돼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대규모의 독립기념관 아니고도, 그 이문 안 고목이 대변하고 지켜 보았던 민족 의지의 어떤 조촐한 흔적만이라도 그 현장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따라 더욱 그런 맘이 간절하다.

 

[이규태 칼럼 8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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