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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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7

[근대24] 을미사변(1) 일본인이 양심적으로 쓴 그날의 보고서 [근대24] 을미사변(1) 일본인이 양심적으로 쓴 그날의 보고서 [이 영상은 너무 참혹한 진실을 담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성인 인증을 해야만 볼 수 있습니다] 민비(1851~1895)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요동반도를 되돌려주고 일단 찌그러든 일본... 이후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갑오개혁(1894)으로 1차 김홍집 내각, 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 모두는 친일내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부상하면서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김홍집 친러내각이 구성되었다. 청일전쟁 이후에 별로 얻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인 민비를 제거해야 겠다는 갱각을 한다. 작전명... [여우 사냥] 민비는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민비는 눈이 양옆으로.. 2021. 7. 2.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1880년대 초반 개화 정책으로 의정부와 6조 사이에 개화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었다. 그리고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여 구식군대로 개편하고, 신식군대로 별기군을 창설한다. 조사시찰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영선사를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에는 국고가 탄탄했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민비는 모자란(자폐증세가 있는) 순종의 건강을 위해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살을 투하하고, 고종은 매일 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국고를 탕진하기 시작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하루에 왕과 왕비가 쓰는 돈이 천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이 10년간 비축한 재산을 고종과 민비가 1년만에 탕진한 .. 2021. 6. 20.
[근대10] 대원군 VS 민비(며느리 잘못들인 시아버지의 비극) [근대10] 대원군 VS 민비(며느리 잘못들인 시아버지의 비극) 흥선대원군이 1863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1873년까지 10년간 집권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 왕권강화(안동 김씨 축출, 과거제 부활, 비변사 폐지, 경북궁 중건, 『대전회통』, 『육전조례』 편찬)를 꾀하였으며, 민생 안정을 위해 삼정의 문란을 개혁(양전사업, 호포법, 사창제)하려고 하였고, 서원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에 1866년에 병인박해,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1868년에 오페르트 토굴 미수 사건이 일어났으며,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기도 했다. 1863년에 12시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15세에 중전을 맞아들이게 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은 .. 2021. 6. 20.
[근대7]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진짜 이유(Feat.풍수지리) [근대7]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진짜 이유(Feat.풍수지리) 1866년 1월 - 병인박해 1866년 7월 -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 10월 - 병인양요 1868년 -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1788~1836)의 묘를 이장시켰다. 이하응은 당시 유명한 풍수지리가 지관(박재상)에게 명당을 추천해 달라고 하였는데, 지관이 두 개의 명당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하나는 자손이 대대로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될 명당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었다. 이하응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묘자리를 선택했고,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시켰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 말기 도선(827~898)이라는 승려가 도입하였는데, 신라가 .. 2021. 6. 20.
[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흥선대원군 이전의 대원군들을 죽고 난 다음에 대원군 칭호를 받은 것이고, 흥선대원군은 살아있을 때 그 칭호를 받았다. 이전의 대원군들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10년간 집권(1863~1873)한다. 그 기간의 중간 즈음에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단행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쇄국정책)을 펼쳤다. 이것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에 발목을 잡았다는 역사적 비판을 오늘날까지도 받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인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에서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부대에 개박살난다. 이때 러시아가 중재.. 2021. 5. 31.
[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흥선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리고 왕이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개혁작업을 시작한다. 1. 왕권 강화 대부분 왕조 시대에 왕권을 강화하는 왕은 전성기를 누리며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통일신라의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혁파하면서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고려의 광종은 호족과 개국공신 세력을 제거하면서 왕조를 안정화시켰다. 고려의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빼앗고, 권문세족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하면서 개혁작업을 하였다. 조선의 태종은 개국공신과 외척을 제거하고 사병을 빼앗으면서 왕권을 강화하여 이후 세종의 태평성.. 2021. 5. 31.
[근대2] 세도정치기와 흥선대원군의 등장 [근대2] 세도정치기와 흥선대원군의 등장 조선의 19세기룰 세도정치기라고 한다. 정조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순조(재위 1800~1834)가 11살에 왕이 되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1809~1830)는 나름 똑똑했다고 하지만 비명에 죽고, 효명세자의 아들이 8살에 즉위하여 헌종(재위 1834~1849)이 되었다. 헌종 역시 23살에 갑자기 죽게 되었고, 강화도령 철종(재위 1849~1863)이 19세에 왕이 되었다가 33살에 죽게 된다. 이러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년간을 세도정치기라고 이야기한다. 이 시기는 왕권이 완전히 실추되었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가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17세기가 나름 붕당정치가 활성화된 시기라고 본다면, 18세기는 노론의 1당 독재 시기였고, 19세기는 노론.. 202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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