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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이 1선발로 참전했고, 임진왜란 초기의 주요한 전투를 다 승리로 이끈 상징적인 장수였다. 조선의 조정 입장에서 복수를 위해 일본 열도를 공격하지는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특히 고니시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공교롭게 고니시는 일본으로 가기 가장 어려운 지역에 있었다. 순천왜성이 있는 고니시는 병력 손실을 당하지 않고 일본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서 명나라의 유정과 진린 등에게 뇌물을 바친 것이다. 명나라 장수들에게는 조금 통했지만 이순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사천의 남.. 2021. 5. 7.
[임진왜란61] 노량해전(1) - 이순신, 역사상 최대 해전을 기획하다. [임진왜란61] 노량해전(1) - 이순신, 역사상 최대 해전을 기획하다. 기원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최대 해전은 노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니시의 고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조선에 출정했던 왜군들은 본국으로 가려고 한다. 이때 순천왜성을 지키고 있던 고니시는 육지로 가자니 너무 멀고 도중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서 위험하고 바다로 가자니 이순신과 진린이 막고 있어서 쉽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고니시의 흥정 1] 고니시는 우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명나라 유정과 흥정을 하였다. 고니시는 자신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눈을 감아준다면 순천왜성의 군량미와 무기를 유정에게 넘기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유정은 명나라 군졸 40명을 인질로 내어준다. [고니시의 항의 1] 15.. 2021. 5. 7.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는 아래와 같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한 명의 싸이코(똘아이)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난다. (당시 조선의 인구 20~50%가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렵게 낳은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믿을만한 가신들을 조선 정벌에 참여하게 하였고, 조선을 점령했을 때 영지를 하사하고 나름 가신들의.. 2021. 5. 7.
[임진왜란59] 이순신VS진린/왜군을 절여버린 절이도해전 [임진왜란59] 이순신VS진린/왜군을 절여버린 절이도해전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절에 하필이면 왕이 선조였고, 이순신의 옆에 원균 같은 선배가 있어서 상당히 고생했다. 그런데 이제 이순신은 또 다른 새로운 강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1543~1607)이라는 사람이었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서해바다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고화도에서 108일간 머물면서 판옥선을 40척 증강시킨다. 그리고 이듬해 고금도로 옮겨서 점차 조선의 수군을 증강시켜 나갔다. 이때 판옥선의 숫자를 80여 척까지 늘였다. 『이충무공행록』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에서 남쪽으로 3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산이 첩첩이 둘려 지세가 기이하고 또 그 곁에 농장이..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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