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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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5

[병자호란4] 이것이 정묘호란이다.(옷에서 잡음이ㅠ) [병자호란4] 이것이 정묘호란이다.(옷에서 잡음이ㅠ)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자(1616년) 명나라는 후금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조선과 함께 후금을 공격하였다(1619년, 사르후 전투).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하면서 만주(요동과 요서)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의 군주는 광해군(1608~1623)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려고 했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니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당시 상황으로 파병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비변사 뿐만 아니라 삼사의 젊은 관료들까지 나서서 파병을 해야 .. 2021. 5. 12.
[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9년에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요동은 물론 요서지방도 장악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수도를 허투알라에서 요양으로, 그리고 심양으로 옮기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착실하게 다져갔다... (무슨 개가 영역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예전에 금나라를 세웠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도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었다. 이때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를 장악한 후금이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을 지키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산해관은 웅정필(1569~1625)이라는 사람이 나름 잘 지키고 있었는데 왕화정이라는 멍청한 부하 때문에 제거되었다... 2021. 5. 12.
[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1619년 사르후전투는 동북아의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는데, 그 이전인 1615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명은 예허를 도왔고 우리 백성의 벼 수확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시키지 못할 터, 만일 1천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누르하치는 이전부터 야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예허여진’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만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만.. 2021. 5. 11.
[병자호란1] 누 르 하 치 (17분 순삭ver.) [병자호란1] 누 르 하 치 (17분 순삭ver.) 누르하치가 어떻게 만주를 통일하였는가? 누르하치는 솔직히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보다 뛰어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입장에서는 항상 북방민족이 두려운 존재였다. 만주의 여진족이나 예맥족은 ‘반농반목’(半農半牧)을 하였다. 과거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였는데, 이후 몽골의 테무친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송까지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였다(원나라, 1271~1388). 이때 원나라 치하에서 한족은 가장 하층민 취급을 당하였다. 100년 동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한족은 주원장이 등장해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때 쫓겨 올라간 몽골족은 북원을 건국하고 언젠가 다시 중원으로 진출하.. 2021. 5. 11.
[임진왜란64]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나라, 일본과 여진의 상황(17분 순삭ver.) [임진왜란64]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나라, 일본과 여진의 상황(17분 순삭ver.) 임진왜란은 당시 동북아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만약 당시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부대가 유럽으로 쳐들어갔다면 유럽의 나라들도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 조선의 변화 조선의 바보 같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왕이었다는 것이 우리나라로서는 비극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이 왕이 되어서 나름 전후복구를 시도한다. 그런데 전쟁 이후에 왕권이 약해진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비변사(備邊司)가 강력한 기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원래 비변사는 원래는 중종(1506~1544) 때 삼포왜란(1510)을 계기로 만들어진 임시군사기구였다. 이 비변사가 명종(1545~1567) 때 을묘왜변(155.. 202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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