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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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7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는 아래와 같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한 명의 싸이코(똘아이)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난다. (당시 조선의 인구 20~50%가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렵게 낳은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믿을만한 가신들을 조선 정벌에 참여하게 하였고, 조선을 점령했을 때 영지를 하사하고 나름 가신들의.. 2021. 5. 7.
[임진왜란58] 반격의 서막-울산왜성 전투(feat.가토 개고생)15분순삭ver. [임진왜란58] 반격의 서막-울산왜성 전투(feat.가토 개고생)15분순삭ver. 이순신은 임진왜란 직후에는 지장의 모습, 조선수군이 궤멸된 이후에 명량해전에서는 용장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명량해전 이후에 조선수군을 완벽하게 부활시키는 과정에서는 덕장의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일본은 한때 천안까지 진격했지만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직산에서 구로다를 막아내고, 이순신에게 또 다시 수군이 털리면서 수륙병진작전이 좌절되면서 다시 후퇴하여 남해쪽의 왜성으로 들어간다. 이쯤 되면 자기들이 왜 정유재란을 일으켰는지 상당한 자괴감을 가질법도 했다. 당시 일본은 정유재란 때 많은 조선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다.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피로인(被擄人)이라고 한다. 조명연합군은 다시 일본을 압박하려고 한다. 명나라에서.. 2021. 5. 6.
[임진왜란32] 함경도를 탈환하다 (Feat. 북관대첩비) 끝까지 보셔야 할 영상 │황현필 한국사 정문부 장군의 하이라이트는 북관대첩(1592.9~1593.2)인데 이 북관대첩은 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면서 승리한 여러 전투를 총칭한 명칭이다. “함경도의 적세는 다른 도보다 강합니다. 안변에서 육진까지 모두 왜장을 배치하고 각기 3~4백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또 민간에 사람을 내보내 필요한 물건들을 날마다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요해처에는 복병을 많이 배설하여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살육과 약탈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모두 분발할 것을 생각하면서 애타게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길주 이북의 상황이 궁금한 일본군은 길주에서 최정예병력 92명을 경성 근처까지 보내보지만, 정문부가 92명을 다 잡아서 죽여버린다(경성전투, 1592.9.16). 장평(장.. 2021. 4. 21.
[임진왜란31] 정문부의 함경도 순왜 척결과 6진 회복(선무1등공신 누구여야?)│황현필 한국사 가토가 함경도를 장악하고 여진족까지 공격했다가 패하고 길주까지 내려왔다가 가장 따뜻한 안변까지 내려가 있었다. 일본군과 왜군? 당시 사료에는 ‘왜군’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왜’(倭)는 일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고, 왜구(倭寇)는 일본의 해적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본(日本)은 7세기 중반 이후 사용된 왜(倭)의 국호(國號)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적을 ‘왜군’이나 ‘일본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함경도는 왜 반역의 땅이 되었을까? 원래 이성계는 함경도에 있는 군사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단종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1453)이 발생하였고, 이때 김종서의 부하였던 6진의 책임자 이징옥(1399~1453)이 난을 일으켰다(1453). .. 2021. 4. 21.
[임진왜란30] 가토(가등청정)의 함경도 점령과 여진족 공격, 그리고 새로운 영웅의 등장 │황현필 한국사 함경도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면서 가장 차별받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함경도의 북쪽에 6진을 개척하도록 하였는데 오늘날의 부령, 회령, 종성, 은성, 경흥, 경원이다.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고 삼남지방의 주민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썼다. 그렇게 해서 함경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과거에 낙방한 사람들이나 땅이 없는 소작인들, 노비들이 나름 혜택(?)을 받기 위해 함경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조선 사람들은 북쪽(4군과 6진)에 사는 사람들이 뿌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함경도로 진출하였는데,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인 이혼은 도망쳐 버렸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15.. 2021. 4. 18.
[임진왜란10] 임진강&대동강 방어전(광해군 분조를 이끌다)-절대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일본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서둘러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왕을 잡게 되면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일본의 100여년의 전국시대 전쟁의 패턴은 성주가 항복하거나, 할복하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면 그 지역은 철저하게 도륙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백성들은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성주가 도망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인 선조는 일본군의 허를 찔러 가장 용감하게 도망쳤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선조가 한 가장 뛰어난 활약이었다... 손자병법의 36계 줄행랑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가장 충격과 멘붕을 선사했다...) 선조가 도망친 이후에 일본군은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양을 점령한 이후에 곧바로 북진하지 못한 것은 이순.. 2021. 3. 31.
[임진왜란9] 선조의 파천과 한강 방어전 (패장은 승진, 승장은 참수?) 도대체 궁궐은 누가 불태운거야? │황현필 한국사 지도에 등장하는 별표는 선조가 도망가면서 세운 임시 수도라고 할 수 있다. 부산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밀양을 지나 탄금대에서 신립을 격파한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와 (추풍령에서) 합류한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사실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1선발 고니시가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부하를 가토에게 제공해준다. 그런데 가토가 허를 찔러서 새벽에 먼저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고니시는 기병만 데리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는 이미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한 직후에 선조는 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두수 같은 관료들에게 이미 튈 준비를 하라고 해 놓고 모른척 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회의를 하게 된다. 이때 파천을 주장하는 이산해(1539~1609)와 목숨걸고 싸우기를 주장..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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