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24] 정여립 / 시대를 너무 앞섰는가? 반역의 대명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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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4] 정여립 / 시대를 너무 앞섰는가? 반역의 대명사인가?

by [수호천사]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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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4] 정여립 / 시대를 너무 앞섰는가? 반역의 대명사인가?

 

[유투브 원본]

 

 

선조 때 사림이 정계 일색을 이루며 정치권력을 사림이 장악하자마자 붕당이 시작된다. 붕당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강경파)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온건파)이 대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당시 율곡 이이(1536~1584)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나름 화해를 도모했던 인물이었다. 동인은 이황(1502~1571)의 제자들이 많았는데 이후 이이를 서인들이 끌어들여서 이이의 학문이 서인들에게 계승된다.

 

이이의 제자로 서인쪽에 가까웠던 인물이 정여립(1546~1589)이다. 정여립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굉장히 뜨거운 인물이다. 그는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시대를 바꾸려는 인물이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1589)이 끝난 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정여립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조선 후기 300년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편중되어 있었다. 정여립에 대한 태몽이 아버지가 고려시대 무신정변을 일으켰던 정중부(1106~1179)의 꿈을 꿨다고 알려진다. 태어날 때부터 반역의 기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렸을 때 잔인해서 새를 찢어죽이기도 했으며, 그것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한 여종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여립의 집안은 명분가였고 과거에 합격해서 이이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성향이 신진사림인 동인과 가까워서 이이가 죽은 뒤에 동인과 어울렸다. 이것 때문에 스승(이이)을 비판하고 욕보였다는 평가도 듣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조가 정여립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스승을 배신하고 왕을 알현할 때 자세도 못마땅하고). 정여립은 관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 지역에 가서 대동계’(大同契)라는 것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양반 이외에도 서얼, 평민, 노비까지 참여하였다. 그리고 승려들까지 대동계에 합류를 한다. 그리고 정여립은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을 설파하였다. 못난 왕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데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군주제를 비판하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공화정을 주장한 것이다. 1907년 신민회에서 공화정을 주장했는데, 정여립은 그들보다 300년 빨리 주장한 것이다. (영국의 크롬웰보다 빨랐다) 1587년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정해왜변) 관군이 막아내지 못하자 정여립이 전라도 관찰사의 요청을 받고 대동계를 거느리고 무찌르기도 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송익필(1534~1599)의 증조 할머니가 노비라는 것을 동인이었던 이발(1544~1589)이 들춰내면서 양반 사회에서 송익필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송익필은 동인이었던 이발을 혼내고 싶어했다. 이때 마침 송익필이 송강 정철(1536~1593)과 친했는데, 송익필이 소문을 냈고, 황해도 관찰사가 정여립이 쿠데타를 모의한다(‘날씨가 추워져서 한강이 얼어붙으면 정여립이 대동계가 올라와서 신립 장군(1546~1592)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것’)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때 선조는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전에 군대부터 내려보낸다. 이때 정여립이 자결했다고 한다. 실제로 쿠데타를 모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여립이 사면초가로 몰려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서인이 죽였다는 시각도 있다) 정여립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혁명가였다고 할 수 있다.

 

선조는 당시 서인이었던 송강 정철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였다. 정철은 글은 잘 썼지만(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글과 인성이 일치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 정철은 동인 백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정여립과 조금이라고 관련이 있는 사람은 다 죽여버렸다. 이때 동인들이 많이 죽어나갔는데, 동인의 최고 인물 이발(1544~1589)도 죽음을 당한다. 선조는 이발의 80넘은 노모를 곤장으로 죽여버리고. 10살짜리 이발의 아들을 압슬형(壓膝刑)으로 죽여버린다. 이것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기축옥사로 죽어나간 동인과 호남의 지식인들 거의 천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조선왕조는 서인과 그 이후 노론, 세도가문이 장악한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동인을 많이 죽였던 기축옥사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 정여립은 금기어였고 반역의 대명사가 되었다. 기축옥사로 호남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고 한다.

 

이후 송강 정철이 세자 건저의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호남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전라도 담양에서는 정철과 관련된 담양 소쇄원, 담양 식영정 등으로 정철을 지역을 빛낸 인물로 높이고 있다. (정철이 호남의 지식인의 씨를 말렸는데... 그를 높이는 건 솔직히 코메디가 아닐까?)

 

정여립의 시신이 한양으로 올라왔을 때 선조가 정여립 시신의 사지를 찢는 과정을 관리들에게 직접 보게 하였다. 이때 김빙(1549~1589)이라는 신하는 바람이 불면 눈물을 흘리는 병이 있었는데 정여립의 사지를 찢는 것을 보다가 바람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많은 동인들이 죽었지만 동인 출신 이산해가 영의정이었고 유성룡이 우의정이었으며, 서인 출신의 정철이 좌의정이었다. 유성룡과 정철이 술을 마시면서 포스트 선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었었다. 당시에는 선조의 아들이 9명 모두 다 후궁 출신들이었고, 중전인 의인왕후(1555~1600)는 아들이 없었다. 선조는 인빈 김씨 아들인 신성군을 사랑하지만,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이 더 왕재라고 하는 데 의견일치를 본다. 세자 책봉에 대해서 정철이 선조에게 말했을 때, 선조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똑똑한 광해군에 대한 열등의식?) 이것을 영의정 이산해가 눈치채고 정철을 비판한다. 세자 건저의 문제’(1591년)로 이산해는 정철을 죽이자고 하고, 유성룡은 정철에 대해서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세자 건저의 문제가 들어감)을 계기로 북인과 남인으로 분화되었다. 북인은 서인에 대한 강경파로 이산해가 중심이었고, 남인은 서인에 대한 온건파로 유성룡의 중심이었다. 남인이 승리해서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임진왜란(1592)이 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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