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7] 연산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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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조선17] 연산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by [수호천사] 202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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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7] 연산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연산군(재위 1494~1506)은 폭군의 대명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갑자사화(1504) 이후에 폭압적인 정치를 자행한 것이다. 그는 폐비 윤씨(1455~1482)의 아들로 성종이 38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연산은 처음부터 쓰레기였나?

 

성종에게는 다른 왕비인 정현왕후(1462~1530)가 있었고,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훗날 중종, 재위 1506~1544)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세자를 바꿀 수도 있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배다른 형제가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중종의 가계도를 보면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있었고,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있었는데 문정왕후가 인종을 핍박해서 인종이 8개월만에 죽고 바보 임금 명종이 즉위한다. 숙종의 가계도를 보면 장희빈의 아들 경종과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훗날 영조)이 있었다(이때 영조의 어머니가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감히 세자를 바꿀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세자를 바꾸거나 하려면 뭔가 명분이 확실히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연산군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는 세자를 바꾸려는 의견이 없었다는 것은 나름 연산군이 왕이 되는데 문제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통 연산군이 간신 임사홍(1445~1506) 때문에 어머니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고 외할머니를 만나 피묻은 옷을 본 것이 실록에 등장하는데, 상식적으로 21살에 왕이 되는 연산이 그때까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모르고 살았을까? 연산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승평부 부인)의 손에 자랐는데, 아마도 대충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눈치를 챘을 것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세자 시절에 처신을 잘했기 때문에 세자를 바꾸자는 의견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몰랐다면 바보였을 것이다)

 

연산은 아버지 성종이 삼사 신하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경연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왕권이 미약하다는 것에 불만으 품었을 것이다. 이후 연산은 왕이 된 후에 대간들과 사이가 벌어지고, 대간들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훈구대신들을 끌어들였다. 훈구대신들 중에서는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신하들이 있었는데 나름 연산이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 훈구대신들과 별 탈이 없었다. 이것은 마치 훗날 정조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대신들과 잘 지낸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연산은 무오사화(1498) 때까지 4년동안 별 탈 없이 지낸다

 

무오사화(1498)

 

사림의 계보 중에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의 사초로 올린다. 사초는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역사서인 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자료로 왕조차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의 실록은 황제가 개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조선의 실록은 철저하게 왕을 배제하였다. 세종대왕이 실록작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을 때, 신하들은 세종은 믿을 수 있겠지만 후대 왕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거절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조차 역사 서술에 관여하지 못했는데, 오늘날 국사교과서에 5년짜리 선출직 대통령이 관여하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90%의 역사가들이 좌편향되어있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렇다면 90%의 다수가 문제인가 아니면 10%의 우편향이 문제인가?

 

결국 연산은 사초를 보게 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초나라 항우가 조카뻘인 의제 황제를 죽여버린 것에 대해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다. 이것은 은근히 연산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죽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며 나아가 연산군의 정통성에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볼수도 있었다. 이에 연산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능지처참해 버렸다. 그리고 김종직과 김일손을 따르는 사림들을 많이 죽였다. 이때 김굉필, 정여창은 귀양갔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다. 이로 인하여 사림들이 위축되고 연산군의 힘이 세지면서 훈구세력의 힘도 강해졌다.

 

왕권 강화 이후 쓰레기로 변신?

 

연산은 차근차근 왕권을 강하해 나갔다. 조선의 군주들 중에서 왕권을 강화한 사람은 태종 이방원과 세조 수양대군인데 그들은 모두 6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그런데 연산은 한 발 더 나아가 중국의 황제와 같은 권력을 누린다. 왕권을 강화한 것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는 효과를 가져오는데 연산은 강력해진 왕권을 이후에 자신만을 위해 썼다는 것이 문제다.

 

연산군은 총 재위기간 12(1494~1506) 중에서, 재위 4년에 무오사화를 일으키고(1498), 재위 10년에 갑자사화를(1504)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나름 괜찮은 정치를 했다. 여진족을 정벌하고, 왜구를 물리쳤으며, 공신들의 공신전도 회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갑자사화(1504) 때 폐비 윤씨 죽음에 동조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재위 마지막 2년 동안은 거의 쓰레기급 인성을 보여준다.

 

무오사화 때 많은 신하들이 죽었다고 비판하지만, 그런 기준으로 따지면 훗날 선조가 기축옥사(1589) 때 죽인 동인은 1,000명에 육박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폭군의 대명사로 부각되었고 연산군의 재위 전반과 세자 시절부터 쓰레기였다고 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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