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38] 웅포해전-임진왜란 최초 수군들의 상륙공격│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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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38] 웅포해전-임진왜란 최초 수군들의 상륙공격│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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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 가문을 지키려고 했던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 중심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중심의 동군의 맞붙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가 일어난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고 에도 막부가 시작된다(1600~1868).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서군의 장수 세 명의 목을 날린다. 이때 목이 날아간 장수는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로 모두 다 행주대첩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이순신은 1592년에 총 4차례 출정을 하여 모두 승리하였다.

     1차 출정 : 옥포(1592.5.4), 합포(1592.5.7), 적진포(1592.5.8)

     2차 출정 : 사천(1592.5.29), 당포(1592.6.2), 당항포(1592.6.7), 율포(1592.6.7)

     3차 출정 : 한산도(1592.7.8), 안골포(1592.7.10)

     4차 출정 : 부산포(1592.9.1)

 

해가 바뀌어 1593(계사년)이 되어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세 번이나 출진을 독려하는 장계를 내려보낸다. 역시 선조는 입으로 싸우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평양을 이긴 채 승전한 기세대로 몰아치매 겨우 숨이나 쉬는 흉한 적들은 서로 뒤이어 도망가므로 서울에 있는 적들도 또한 반드시 도망해 돌아갈 것이니, 그대는 해군들을 남김없이 이끌고 나아가 합세하여 모조리 무지름으로써 배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기약하라
- 1593년 1월 29일자 조정의 출동명령서 -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좌수사 원균과 견내량에서 만나기로 한했다. 이순신은 여수 본영을 출발해서 사량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견내량으로 갔는데 이미 원균은 와 있었다. (가까우니까) 그런데 원균은 이억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이억기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다) 전라우수영은 해남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에는 이억기가 신안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28. 맑다. 아침에 영남우수사(원균)가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 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후 4시쯤에 출발하여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닿았다. 『난중일기 中』

 

 

당시 부산에는 일본의 배가 500여 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은 어차피 바다에서는 이순신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남해바다에 왜성을 많이 만들어 놓았고, 안골포 옆 웅천에 전진기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순신은 부산포를 공격하기 전에 웅포를 먼저 공격해야 했다. 웅포의 적은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이때 판옥선은 총 89척이었는데, 이순신이 40, 이억기가 42, 원균이 7척을 거느리고 있었다. 협선과 포작선을 포함하면 약 300척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때 이순신은 웅포에서 적선 20여 척을 깨뜨렸다고 하는데 일본의 기록에는 50척이 침몰되었고 2천명의 왜군이 죽었다고 나온다. 이것이 웅포해전(1593.2.11~3.6)이다.

 

 

이때의 전투에서는 적이 상대하러 나오지 않자 이순신은 수군을 상륙시켜 싸우기도 했다. 이순신과 함께 했던 승병장 심혜와 의승, 의병장 성응지(?~1594)등이 웅포 근처로 상륙해서 싸움을 전개하기도 했다. 15척의 판옥선이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2척의 판옥선이 서로 충돌한 틈을 타서 일본의 세키부네가 달려들어 백병전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때 근처에 있던 원균은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이순신이 거북선과 판옥선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구해내었다.

 

228일과 36일에 다시 나가 싸웠는데 총탄과 화살도 전보다 더 많이 쏘았거니와 언덕 위의 적의 진지에 진천뢰를 쏘았는데, 터지고 부서지고 죽고 상하여 시체를 끌고 쩔쩔매며 달아나는 적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은 육지에 있고 우리는 배위에 있어서 역시 적들의 목을 베지는 못했습니다. 이곳의 적들은 모두 소굴을 만들고 거기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아 섬멸을 기약할 수 없으므로 바람결을 따라 불로 공격하려고 310일 사량 앞바다로 물러와 진을 치고 화선을 준비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명나라 군대는 오래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부질없이 적선만 불태우다가는 갈 길이 없어진 적이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므로 잠시 그 일은 멈추고 대병선을 정하여 웅천으로 보냈습니다. 『토적장 中』

 

발포 2,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걸려 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난중일기 中』

 

원균이 선무1등공신이 된 것은 원균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조 때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서류였던 임진장초를 통합해서 이충무공전서가 만들어지면서 원균의 악행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

 

대저 이때를 당하여 비록 분부가 없었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 마땅히 적군의 도망하는 것을 살피어 그 돌아가는 길을 끊고 맹세코 배 1척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해야 할 터인데, 이번에 출동한 지 벌써 두 달이나 지나도록 명나라 군대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각처에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당장 농사철이 되어 비가 흡족히 내렸지만 연해안 각 진이 모두 다 바다로 내려왔으니 좌우도 수군 4만여 명이 모두가 농민이라 농사를 전폐하면 가을 추수의 소망은 바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8도 가운데 오직 호남이 그나마 안전하여 군량이 모두 이 도에서 나옵이다. 하지만 도 안의 장정들은 다 수륙의 전쟁으로 나가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군량을 운반하느라 경내에는 남은 일군이 없어 봄 한철이 다 지나도록 들판이 쓸쓸하니, 다만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라 군국의 물자도 의뢰할 데가 없어 극히 답답하고 걱정되옵니다. 선부와 격군들이 비록 교대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자 하나 달리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영 살아 갈 길이 끊어질뿐더러 유행병조차 퍼져 죽는 자가 속출하고 있으니, 명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날일지라도 이런 병들고 굶주린 군졸을 거느리고는 도망가는 적들을 막고 섬멸하기가 어려울 형편입니다. 그러므로우선 번차례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함과 동시에 병든 군사를 간호하고, 군량을 준비하고, 전선을 정비하면서, 명나라 군대의 소식을 살펴 듣고 기회를 타 전쟁에 나가도록 지난 43일 이억기와 약속하고 본도로 돌아왔습니다.
참전할 때 탄환에 맞아 부상한 사람들은 발포 통선 전사자와 한꺼번에 기록하옵니다. 『토적장』

 

웅천왜성을 지키는 총사령관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는데 그는 절대로 바다에서 이순신과 맞짱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일본군 2000명이 죽었고, 왜선 50척이 침몰되었는데 이것을 일본이 이긴 전투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이순신으로서는 웅천왜성을 점령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던 전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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