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6] 히데요시의 분노와 이순신의 잠 못드는 밤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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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6] 히데요시의 분노와 이순신의 잠 못드는 밤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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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원균이 과연 유능한 장군이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원균은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인 것 같다)

 

임진왜란 전에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지역에서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 진영을 조율하는 초유사로 임명된다. 이때 김성일은 이렇게 보고한다.

 

“도내에 감사가 없으니 모든 적변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지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 이각은 뒤이어 동래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 원균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의 주장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 『선조실록』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

 

원균은 용감하게(?) 자신이 소유한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망치기 위해서 자신의 배에 있던 함포까지 버리고 노를 젓는 사람들만 데리고 도망친 것이다.

 

이순신은 옥포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에 다음과 같은 장계(옥포파왜병장)를 올린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중략) 7일 새벽 다같이 출발하여 정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장 김완과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올려 변고를 알리므로 적선이 있는 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기를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 같이 정중하라”고 지시한 후… - 『옥포파왜병장』(1592.5.10) -

 

계속해서 이순신은 백성들의 상황까지 언급하고 있다.

 

“흉악한 왜적들이 해독이 이 지경에 이르러 벌써 살육도 많고, 사로잡고 노략질한 것도 많아 이 지방에 사는 창생들로 고아가 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신이 이번에 연해안을 두루 돌며 보니 지나는 산들마다 피난민이 없는 데가 없고, 신의 배를 바라보고는 아이, 어른 할 것이 없이 메고 지고 서로 이끌고 달려와 흐느껴 울고 부르짖으며 마치 살길이나 얻은 것처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혹은 왜적들의 종적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나무 참담하게 보여 모두 싣고 가고도 싶었으나 그 수가 너무 많을뿐더러 전쟁하는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싣고 운행이 어려울 일을 걱정해 뒷날 돌아갈 때 데리고 갈 것이니 각각 지혜롭게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말고 또 사로잡히지 말도록 하라고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 『옥포파왜병장』

 

또한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각종 노획품은 5칸 창고에 쌓고도 넘쳤다. 쌀 300여 섬은 노 젓는 군사와 활 쏘는 군사들 중 배고픈 이들에게 적당히 분급하고, 의복과 무명베 등은 모든 군사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다. 왜적을 무찌르고 나면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것이다. 또 전쟁에 쓸 수 있는 물품은 분류해 따로 잘 간수해 두었다.” - 『난중일기』

 

당시 조선의 군역제도는 보법제였는데 정군 1명과 보인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인은 정군의 경비를 충당하는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수군은 보인이 3명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수군이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힘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히데요시 : “조선 해군의 실제와 행각, 그리고 그 전의 해전 상황들을 빠짐없이 보고하라

 

“적은 전라도 지역에 근거를 둔 조선 해군인 듯하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행방과 병력, 적장에 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00여 척이나 되는 전선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는데, 이것이 적이 보유한 모든 병력인지 아니면 일부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옥포에서는 수천의 사상자가 생겼고 거의 모든 전선이 해전 중 파괴되거나 전소되었다…” - 히데요시에게 보고된 옥포해전 -

 

물론 왜군의 입장에서는 패전의 상황에서 적의 병력을 의도적으로 부풀려야 욕을 덜 먹기 때문에 조선의 수군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름 섬나라이기에 수군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히데요시는 노발대발한다. 당시 히데요시의 참모인 구로다 간베이(1546~1604),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등은 바늘방석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린다.

 

“다음의 사항을 우키타(우키다 히데이에, 1573~1655) 사령부에 전하라. 첫째, 지체 말고 조선왕을 사로잡을 것. 둘째, 속히 전라도를 속지로 삼아 원정군의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할 것. 셋째,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고 성을 쌓을 것. 넷째, 남아 있는 조선의 해군들을 찾아서 철저히 섬멸할 것. 다섯째, 서해안 돌파를 서두를 것.”

 

적진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이순신의 수군은 한양이 털리고 선조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고 한다. 비록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앞으로 부산에 있는 왜군의 본진과 정면으로 대결했을 때 전라좌수영의 군사들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이순신은 더욱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하게 된다.

 

전라우수영 이억기가 63일까지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27일에 원균이 왜군 선단 10여 척을 보고 노량으로 도망쳤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찌질한 원균이 왜군을 모시고 전라좌수영 본영을 향해 오는 격) 왜군이 사천에 왜성을 만들어 기지로 삼는다면 여수의 본영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고 이순신은 이억기를 기다릴 틈이 없이 2차 출정을 감행한다. 이때 혹시나 왜군이 여수의 본영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방비를 해 놓고, 23척의 판옥선과 거북선 두 척을 거느리고 사천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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